고무신 한 켤레

 

                                                                                       김해남

남편이 장에 가서 고무신을 사 왔다.

“바꿔 신으면 안 될 것이네.”

툭, 던지는 말에 장난기가 묻어 있어 나는 곱게 눈을 흘기면서, 귀밑머리 희끗한 중년의 남편과 모처럼 마주보며 웃었다.

여자라면 당연히 몸통이 조붓하고 코가 오똑한 고무신을 신어야 마땅한데, 나는 왜 그런지 남자 고무신이 좋다. 매무새가 푼더분한 게 볼품은 없어도, 들일을 하고 돌아 와 그냥 벗어 훌훌 도랑물에 담그고 양 발가락으로 서너 번 슬쩍 문지르기만 하면 고단했던 하루가 물깃에 쓸려간다.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와도 왼쪽 오른쪽 따지지 않고 그저 발에 걸고 달려나가면 되니, 이보다 더 편한 신이 어디 있겠는가.

십구 문짜리 고무신, 왠지 발이 아프다. 아내의 발 크기를 모를 리 없는 남편이 한 문수 작은 걸 사다주는 속내는 무엇일까. 농담 같은 말 속에는 아직도 아내를 못 미더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일까. 바꿔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신기로 한다. 금방은 발뒤꿈치가 아파도 자꾸 신어 버릇들이면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설움만 총총했던 새댁 시절, 세 끼 밥 꼬박꼬박 다 챙겨 먹어도 나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음식을 장만하고, 빨래를 하고, 군불을 지피는 것도 그리 신명나지 않았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고무신을 닦는 일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들일을 나가면, 나는 때에 찌든 고무신을 닦았다. 이웃분들이 놀러와도, 나는 얼른 벗어둔 고무신들을 세숫대야에 담았다. 고무신을 깨끗하게 닦아 댓돌 위에 가지런히 세워놓으면, 어르신들은 한 입으로 나온 것처럼 모두 좋아하셨다. 칭찬을 들으면 나는 신바람이 나서 더 열심히 고무신을 닦았다.

첫 아이를 낳고 친정에 다니러 갔을 때, 하룻밤만 자고 간다고 하던 딸이 맹그작거리면서 일어설 줄 모르니,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는 어린것을 들춰 업고 내 손목을 다그쳐 시댁 대문 앞에 내려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때 아이에게 신겨주신 콩 꽃무늬 고무신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나는 버릴 수가 없었다.

고 조그마한 발에 고무신을 신겨 마당에 내려놓으면, 아이는 좋아라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땅긋기놀이를 했다. 팔랑팔랑 동그라미를 만들 때마다, 콩꽃 같은 웃음은 온 마당에 자지러졌다. 헤딱헤딱 까불다가 흙투성이가 되면 아이는 제 혼자서도 툭툭 털고 일어났다. 마당에서 뛰어 노는데는 고무신이 제격이었다.

여름이면 나는 도랑에서 빨래를 하고, 어린아이들은 내 곁에서 멱을 감았다. 방망이 장단에 맞춰 아이들은 찰방찰방 물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심심하면 기차놀이를 하고, 피리며 다슬기를 잡아 고무신에 담았다. 어디선가 기적 소리가 들렸다. 어설픈 기차는 시골 간이역을 지나 도시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기적 소리에 매달려 신나게 달리다 보면 어느 새 해는 지고, 아이들을 앞세워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들도 이제 어른이 되어 모두 나가 살지만 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이면 나는 슬그머니 벽장으로 기어올라 고무신을 내려놓는다. 늘 발목을 조이던 운동화나 구두끈은 잠시 풀어 쉬게 하려고. 격식에 매여 함부로 고무신을 신고 다니지 못하는 도시생활에 비하면, 고무신을 신고 이웃집에 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장터를 걸어도 인상 찌푸릴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갛게 닦은 고무신을 댓돌 위에 갸웃이 세워놓고 방으로 들면, 마치 선방에 들어 참선하는 스님의 마음처럼 경건해진다. 농삿일 틈틈이 잠시 쉴 참에도 깊은 사색을 불러모을 수 있으니, 시답잖은 시골살이지만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

내 남 없이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가 사다 주신 고무신 한 켤레, 발 크기에 맞춘 지푸라기를 고의춤에 챙겨 장터에서 사다 주시던, 가난해서 더 만만하게 대했던 그 고무신. 다 닳아 헐렁거리는 고무신 뒤꿈치에 광목 천조각으로 기워서 신었던 바늘땀을 따라 가 보면 옛 어른들의 검소한 마음이 보이고, 장터 한구석에서 고무신을 떼우던 절름발이 아저씨도 보인다.

고무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 서 본다. ‘꼭 맞는 고무신은 사 주지 마라’ 우스갯소리처럼 당부하시던 친정어머니의 속내를 아직도 알 듯 말 듯한데, 바꿔 신으면 안 될 것이라는 남편의 애틋한 마음이 발끝에 와 머문다.

 

<에세이문학>으로 추천 완료.

수필산책문학회, 수필문학진흥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