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카데미 제6회 강좌 요지>

 

수필의 감상

 

─ ‘잘 쓴 수필’과 ‘좋은 수필’ ─

 

                                                                                           朴在植

우리가 읽는 많은 수필 가운데서 읽은 보람이 있다고 여긴 작품을 분별할 때, 거기에는 두 가지의 유형적인 요소가 있지 않은가 싶다. 그 하나는 ‘잘 쓴 수필’이고, 또 하나는 ‘좋은 수필’이라는 느낌이다. 물론 ‘잘 쓴 수필’일수록 ‘좋은 수필’일 확률이 크기 마련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잘 쓴 수필’과 장인적인 기교

 

‘잘 쓴 수필’은 얼른 말해서 장인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장인적인 기교’는 모든 예술에 있어 예술다운 작품을 형상하는 기본적인 요건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장인의 기교만으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교는 어디까지나 작품을 형성하는 과정에서의 지엽적인 디테일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흔히 큰 작품일수록 기교가 무시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명색이 예술작품이라고 할 때 지엽을 이루는 기교를 도외시한다는 것은 예술의 본질을 도외시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면 예술의 묘미는 지엽의 디테일을 음미하는 맛에 있기 때문이다. 지엽이 빈약한 나무를 상정해 보라. 그것이 제아무리 거목이라 할지라도 볼품없는 나무에 불과할 터이다. 이 이치를 문학작품에서도 배제할 수는 없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대작을 현미경적인 관찰로 천착해 보면, 거기에는 정교한 구성과 빈틈없는 정경 묘사나 심층심리의 도출 과정 등을 다룬 수법에 있어 범인이 추종할 수 없는 장인적인 기교가 구사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작품이 갖는 웅대한 스케일과 장중한 주제의 그늘에 가려 그 기교적인 요소가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인 것이다. 큰 작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은 큰 기교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잘 쓴 수필’의 조건

 

그러면 수필에 있어서의 ‘장인적인 기교’란 어떤 것일까?

첫째 조건으로 문장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문장이 두루뭉수리로 씌어진 글은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문장 자체가 문학성을 지니자면 여느 문장과는 달리 문학적인 감각에 의해 정교하게 조탁되어야 한다. 이 문학적인 문장을 문체(style)라고 한다. ‘유일한 어휘의 발굴’이라는 헌장을 창안할 만큼 문장의 조탁을 중시한 플로베르는 ‘소재 자체에는 미(美)도 추(醜)도 없다. 문체만이 사물을 보기 위한 절대적인 방법’이라고까지 했다. 특히 짧은 글로 이루어지는 수필에서 금과옥조로 삼을 만한 명언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이것도 문장과 관계되는 요목이지만, 신선한 비유법과 격 높은 유머의 구사 그리고 적실한 전고의 인용은 수필문장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적인 모멘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극약의 처방과 같은 대단한 소양과 절제가 소용되는 기교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리 ‘신선한’, ‘격 높은’, ‘적실한’이라는 전제를 굴레로 씌워놓은 것이다. 진부한 비유나 경박한 유머 그리고 부질없는 지식의 나열 같은 인용은 도리어 글을 망치는 근본이 된다.

다음은 구성이다. 구성은 소재를 작품으로 형성화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마치 낱꽃을 골라 꽃의 모양새와 색상을 볼품 있게 조화시켜 하나의 꽃꽂이 작품을 만드는 작업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은 모든 예술, 특히 문학작품의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문학작품이지만 수필의 구성은 소설이나 희곡의 플롯과는 차별화되어야 한다. 가령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삼았을 때, 소설이나 희곡의 경우 구성의 과정에서 작품의 틀을 이루는 허구성에 의해 재생산되어야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지만, 수필은 어디까지나 체험 그 자체가 작품의 틀이 되어 체험 속에 내재하는 진실에 의해 재구성되는 점에서 플롯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한 마디로 수필작품의 구성은 체험적 소재의 재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재구성’은 소재가 갖는 사실과 논리성의 질서를 좇아 전개하는 기사나 논설문의 평면적인 구성법과 차별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좋은 수필’이란?

 

그러나 ‘잘 쓴 수필’이 곧 ‘좋은 수필’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을 허두에서 잠시 비쳤던 것 같다. 문장이나 구성의 기교가 나무랄 데 없는 ‘잘 쓴 수필’도 읽고 난 뒤의 느낌이 별로 살뜰하지 않은 작품이 얼마든지 있다. 글을 읽을 때의 감흥도 중요하지만 읽고 난 뒤의 느낌이 더욱 중요하다. ‘잘 쓴 수필’은 분석적인 음미를 통해 그 윤곽이 파악되는 질감質感이지만, ‘좋은 수필’은 작품 전체가 주는 느낌에서 오는 감동의 질적 평가이다. 그러니까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는 감상법에 의해 가려지는 작품의 평가라 하겠다.

 

‘좋은 수필’의 조건

 

‘좋은 수필’의 첫 대목으로 꼽아야 할 조건은 내용의 질이다. 글의 뼈대가 되는 내용이 시시하면 당연히 시시한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질이 좋은 내용인가는 관점에 따라 여러 조건이 섬겨지겠지만, 한 마디로 해서 비범성을 지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비범성이라고 하여 유별나고 기발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소재일지라도 거기에 작가의 개성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육화시킨 내용이면 비범성을 지닌다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개성 있는 생명력이란 소재를 대하는 작가적 에스프리와 주제의식과 같은 작가 고유의 감성과 가치관의 작용을 의미한다 하겠다. 늘 듣는 이야기나 노래 같은 인상을 풍기는 내용의 수필은 아무리 잘 다듬어 씌어진 글이라도 ‘좋은 수필’이라는 감명을 받을 수가 없다.

둘째는 잔잔한 흐름 속에서 감동의 너울을 실은 내용의 글일수록 ‘좋은 수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지적인 것이든 정적인 것이든 읽는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주지 못하는 글은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겠다. 감동은 진실과의 조우에서 빚어지는 심리적인 스파크 현상이며, 수필은 내적 진실의 유로(流露)를 본령으로 삼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동적인 글이라고 하여 필자 자신이 감동을 의식한 작위적인 글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작위에는 진실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에는 격랑이 일어도 언제나 고요한 물 밑처럼 잔잔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자아지는 중후한 감동만이 문학적인 생명을 지닌다 할 것이다.

다음은 읽고 난 뒤에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좋은 수필’이다. 격문과 수필 그리고 유행가의 가사와 시가 다른 점은 문체의 문학성에도 있지만, 읽고 난 뒷맛의 여운에서 그 성격이 자별하다. 전자의 글은 말하고자 하는 논지나 정서를 나위없이 직소해 버림으로써 생각할 여운을 남기지 않는 천박성을 지닌다. 그러나 높은 문학의 경지는 한갓 공감의 세계에서 머물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웅숭 깊은 생각의 늪에 잠기게 하는 심장한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끝으로 ‘좋은 수필’은 글 속에서 필자의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른바 ‘글은 곧 사람’이라는 문장의 원리에 충실한 글을 말한다. 이것은 수필문학의 기본적인 요체이기도 하다. 소설은 읽으면서 작가를 의식하지 않은 글일수록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지만, 수필은 읽으면서 필자의 인간을 의식하게 할수록 좋은 수필이 된다. 그러므로 수필 문장의 생명은 진솔성에 있다. 진솔성은 필자의 진실에 입각하는 리얼리티 정신이다. 허구의 문장으로 자신의 인간을 숨기거나 포장한 글은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좋은 수필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수필의 어려움이란 이와 같은 진솔성의 경지에서 자기를 창출하는 작업에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결론하면, ‘잘 쓴 수필’은 형식미가 잘 갖추어진 작품이라 하겠고, ‘좋은 수필’은 내용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요소가 혼연한 작품이 우리가 찾고 바라는 문학수필의 이상적인 모형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