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카데미 제6회 강좌 요지>

 

시인이 쓰는 수필

 

                                                                                       유경환

1`-`1   ‘시인이 쓰는 수필’이라는 이 제목이 좀 야릇하다는 느낌으로 내겐 다가온다. 시인이 쓰는 수필은 뭔가 좀 다르다는 뜻이 살짝 내비치는 듯하기도 하고, 또 본격수필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암시가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이다.

1`-`2   그러나 시인이 수필을 쓴다는 사실, 그리고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이라는 사실, 이 두 가지에는 고려해야 할 어떤 상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시인이 쓰는 수필’이란 공연히 갖다 붙인 수사(修辭)일 뿐이다.

1`-`3   수필. 이는 어디까지나 독립된 장르의 문학작품이다. 수필의 위상이 이러할진데, 시를 쓰는 사람 몇몇이 감히 손을 대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한 실제상황이지 수필의 본질에 부정적 또는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2`-`1   그들은 수필보다 시의 영역에서 먼저 이름을 얻었거나 문단의 자리를 차지하였기에 시인이라는 지칭대명사를 가졌을 뿐이다. 최승범, 허세욱, 유병근, 유경환, 이향아, 신달자… 이런 시인들이 수필을 써 왔다.

2`-`2   그런데 시인이 쓴 수필에 독자는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또는 오해를 지니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시인이 쓰는 수필’이라는 애매한 제목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틈이 엿보인다.

2`-`3   일반적으로 시인이 쓰는 수필의 문체는 이채롭다. 어떻게 이채로운가 하면, 환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묘사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고, 또 이런 기법이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예상밖의 환상을 안겨준다.

 

3`-`1   수필 전문작가 곧 수필가들이 쓰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수필은, 매우 담담하거나 소박한 문체로 논리가 정연하게 서술되므로, 평이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반면에, 시인이 쓴 수필에선 화려한 문체가 돋보이게 마련이다.

3`-`2   여기서 분명하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이 화려한 인상이 풍기는 이채로운 분위기 때문에 시인이 쓴 수필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지만,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는 조금만 지나쳐도 수필의 본질을 오염시키거나 훼손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3`-`3   시인이 자기 생각이나 사상을 산문으로 발현시켜 볼 충동이나 욕구를 느낄 때, 이를 다스리지 못하거나 자제능력을 넘기면 붓을 들게 된다. 이럴 경우 시인이 쓰는 산문과 그리고 시인이 쓰는 수필은 구별해야 하는 것인데, 시인 자신도 식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4`-`1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시인이 쓰는 산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쓰는 수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인의 수필도 수필로서의 작품성과 그 완성도가 수필가의 것 못지않게 충족되어야 함을 절대조건으로 갖춰야 한다.

4`-`2   아무리 이름을 지닌 시인이 썼다고 하더라도, 이 절대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은, 수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시인의 산문에 불과하다. 적잖은 시인이 그동안 출판사의 자가발전기 동력에 힘입어 수필 아닌 산문을 수필처럼 양산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4`-`3   이양하도 시인이고 피천득도 시인이고 노천명도 시인이다. 그들의 수필은 문학작품으로서 뚜렷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들 작품들은 각자 나름의 문장과 문체에서 독특한 개성은 지녔으되, 그러나 운문인지 산문인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의 혼합성은 구사하고 있지 않다.

 

5`-`1   시인이 쓴 산문이 문학수업 지망생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학수업기에 들어 있는 독자 가운데 수필과 시의 공부를 함께 시도하는 경우, 수필쓰기와 시쓰기를 병행하다가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적잖다.

5`-`2   수필은 엄격하게 수필다워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수필은 철저한 산문정신으로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수필 교본의 제1장 제1과이다. 그러나 시는 수필과 겹쳐질 수 없는 상당 부분의 영역을 따로 갖고 있다. 시는 정상적 문장을 일부러 해체하고 단절시키며 도치하거나 생략한다. 이런 형식의 운문인 시는, 결코 산문인 수필과 같은 기법으로 씌어지지 않는다. 함정은 이곳에 숨어 있다.

5`-`3   때문에 수필과 시를 동시에 추구하는 문학수업은 바람직스럽지도 권장될 만한 것도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시인도 수필을 쓸 때 시적인 기법을 활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마련인데, 문학수업 지망생에겐 더 예민한 유혹일 수 있다. 문장에 형용사, 부사의 과잉 구사는 감정의 절제를 못 이룬 증거이다. 수필공부에선 감정의 절제부터 배워야 한다. 시의 공부에선 감정의 절제가 우선이 아니다. 혼선의 위험은 이렇게 나타난다.

 

6`-`1   시는 감성을 자극하는 내적 경향이 큰 편이고, 수필은 지성에 호소하는 내적 경향이 큰 편이다. 이렇듯 두 가지가 조금씩 편향적인 내적 경향을 지닌 것은 부인할 수 없다.

6`-`2   오늘날 ‘시인이 쓰는 수필’이 잡지에 실리는 글의 제목으로 자주 쓰이거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수필에다 시의 내적 경향을 빌어다 얹어보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정수필의 한계 지점에서 시적 인상이 짙은 감성 문체를 그 돌파구로 도입하려는 의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도는 착각의 매력을 주사효과처럼 남길 뿐이다.

6`-`3   수필의 문학적 효용과 시의 문학적 효용은, 인간실존에 원천적 위로와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문학적 효용을 인정하고 가치를 수용하는 태도에 따라서, 곧 독자의 능력에 따라서 차이는 아주 크게 벌어질 수 있다.

 

7`-`1   오늘날 수필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원인 가운데 한 가지는, 수필작품의 감상을 위해 독자가 지불하는 정신작업이 시작품의 감상을 위한 그것보다 평이하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7`-`2   비유로 말하면, 수필은 주위가 아름다운 연못에, 그리고 시는 깊을 수록 물이 찬 우물에 견줄 수 있다. 시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길어 올리는 감상에서 시의 글맛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수필에선 광범위하게 실재하는 보편적 가치에 동의하는 감상으로서 수필의 글맛을 나의 것으로 차지할 수 있다.

7`-`3   그래서 갈증의 세월엔 목마름을 축여주는 시를 더 찾게 마련이고, 갈증의 시대가 지나 우기(雨期)가 오면 풍성한 수필의 향연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시인이 수필을 쓰는 것은, 이 넉넉한 잔치에 함께 참여하고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