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찔레

 

                                                                                            최숙희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에 사는 노신사를 만났다. 하얀 꽃이 소담스레 핀 들찔레 화분을 어린 아기를 안듯 보듬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은 딸네에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분은 수 년 전 홀로 되셨고, 딸 내외가 위층으로 이사를 와서 조석으로 보살펴드리는데 가끔 그들 부녀와 산책길에 동행한 적도 있다. 팔십 중반의 아버지가 오십이 넘은 딸 결혼기념일에 꽃을 들고 찾아가다니. 환히 웃는 노안이 천진스럽기조차 하여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기뻤다.

들찔레, 내 아버지 산소에 피어 있던 꽃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에 있는 아버지 산소. 수 년 만에 산소를 찾은 우리를 아버지는 그렇게 꽃을 피워놓고 기다리셨던 것일까. 아무도 심지 않은 들찔레가 오직 아버지 산소 상석床石에만 가득 피어 있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탄성을 지르며 정말 아버지가 꽃을 안고 우리를 기다리시기라도 한 듯 달려가 안겼다.

 

딸 넷을 각 도에 하나씩 시집보내고 말년에 딸네 집 순례하며 지낼 거라고 호언하시던 아버지는 그 딸들 아무도 시집가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소풍은 즐거웠느냐. 기행문을 써 두어라, 내일 아침에 읽어 보마?”

중학교 첫 봄소풍을 다녀온 저녁, 전화로 기행문을 당부하시던 아버지는 사월의 일요일 아침, 그 ‘내일 아침’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하늘 같은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찌하여 그 아침 햇살은 여전히 반짝이고, 우물가 빨래하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는 그리도 맑게 퍼지던가. 봄꽃이 화려하던 30여 년 전 일이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지금은 팔십 중반이 되셨을 것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가 계셨다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을 많이 하였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이십대에 작은 읍 소재 농업고등학교 교가를 작사하셨으니, 후에 훌륭한 문필가가 되셨을까. 궤짝 속에 가득하던 아버지 서적들. 민속民俗 관련 책들이 많았으니 아버지가 계셨다면 훗날 민속학자가 되셨을까. 돌아가시던 날은 대학 설립 관계로 사람들을 만나고 계셨다지. 교수가 되셨을까, 학교 행정을 하셨을까 그러면 총장이 되셨을까. 아버지 회사 기숙사에는 야간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아버지 아니었다면 어찌 대학공부 할 생각을 했겠냐며 친아버지를 여읜듯 슬퍼하였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훗날 큰 부자가 된 그들을 보며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리고 또 그리고…….

아버지는 장남이면서도 직장 일 때문에 홀로 도회지에서 생활하시다 명절이나 기제사 때만 잠깐씩 오실 뿐이어서 아버지와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런 작은 기억들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름답게 덧칠을 하여 나의 아버지는 오래토록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분’으로 남아 있다.

 

부지깽이도 따라 춤을 춘다고 할 만치 바쁜 농사철. 논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내갈 중참 준비를 하느라 숙모랑 한창 동동대는데 사랑채로 사라지는 도포자락이 얼핏 어머니 눈에 들어왔다. 하필 이 바쁜 날에 과객이라니. 낭패한 심사를 감추고 과객을 못 본 척, 하던 일을 다 마치고 천천히 밥상을 들여가니 사랑채에는 과객이 아닌 아버지가 와 계셨다.

“진작 기척을 하시지요. 과객인 줄 알았습니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과객도 밥은 때 맞추어 먹어야지요”라고 하셨다는 아버지.

어머니와 부부 동반 읍내 나들이도 하셨던가. 두 분이 함께 영화관에서 활동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별안간 필름이 멈췄다. 고요도 잠시, 어둠 속 곳곳에서 관객들이 소요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소요 시간이 길어지자 아버지는 큰 소리로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목소리를 알아챈 사람들이 ‘최선생님이다’며 수군댔고, 다시 영화가 이어질 때까지 극장 안 사람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기다렸다는 얘기도 있다.

아버지는 매우 여유가 있는 분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전설처럼 들려주신 아버지 이야기들 중 일부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조차 오랫동안 ‘나의 아버지는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분’임을 믿게 하였다. ‘너희가 누구의 자식인데’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자식교육은 아버지가 계셨던 ‘화사하고 영화로운’ 시절을 배경으로 아버지 안 계신 ‘목마르고 허기진’ 시절을 잘 견뎌 당당하게 자라도록 한 어머니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러한 어머니의 의도대로 우리는 계시지 않으나 더욱 큰 아버지의 존재를 믿었다.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데.”

 

얼마 전 딸애가 하노버에서 보내 온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뿌리와 날개를 함께 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요. 엄마, 당신은 지난 세월 동안 우리가 함께 있을 때나 때론 떨어져 있을 동안에도 뿌리와 날개를 함께 주셨지요. 엄마, 훗날 나도 내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어머니로 인해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아버지를 기억하는 나는 지금 딸애로 인해 잠시 훌륭한 엄마가 되어 본다. 딸애의 찬사는 아직은 나의 바람이고 그 애는 나의 바람을 상기시켜 주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 과연 나는 훗날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마흔셋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오늘은 4월 19일 아버지 기일, 이제 하얀 들찔레로 아버지를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