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희수

모처럼 맞는 공휴일이라 한껏 늑장을 부리는데 옛 제자 ㅈ군이 아파트 아래서 전화를 했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간편한 복장으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간단한 점퍼에 운동화만 신고 내려갔더니 ㅈ군은 영월을 가잔다. 단종의 넋이 배어 있는 충절의 고장 영월, 그곳은 스물네 살의 내가 교사로서 첫 부임을 했던 근무지이기도 했다.

십오 년 전 광주에서 돌아와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ㅈ군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제 스승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는 지금은 ‘옛날에 선생님이 수업을 이렇게 했다’며 20대 내 모습을 흉내 내며 웃음을 안겨주려 했지만, ㅈ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지금은 ㅈ 가족과도 동기간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 영월을 다녀와야겠다고 했더니 아마 뇌리에 입력을 해 두었던 모양이다.

매양 모든 일이 계획하고 준비를 하다 보면 어디선가 누수현상이 일기 마련, 그런 면에서 즉흥적으로 떠난 듯한 그 날의 영월행은 뜻밖의 행운까지 안겨주는 봄나들이가 되었다.

사실 그 날 오후도 나는 여러 개의 미팅이 준비되어 있어 사전에 조율을 했더라면 아마 어려웠을 텐데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잘됐다. 이렇지 않으면 언제 영월을 다녀오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ㅈ의 차에 느긋하게 올랐다.

화창한 봄날이라 만개한 꽃만 바라보아도 늘 사무실에 갇혀 있던 내게는 금상첨화였다.

주로 차 안에서 ㅈ와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때 졸업생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골 중학교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도회지에서 번듯하게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삶과는 다를 것이다. 다행히 ㅈ 같은 경우는 본인의 노력과 부모님의 성원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지만 거개의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공고로 진학을 한 뒤 그야말로 건설 역군이 되어 땀내 나는 옷을 입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 당시 한 마디로 철없는 선생이었던 나는 아이들과 야외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꽃구경 다니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요즘 같으면 아마 문책감이었을 텐데 순박한 시골 학생들은 제 선생이 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집안의 과일나무 꽃까지 꺾어오느라 야단들이었다.

어쨌든 그 후 나는 한번도 시골다운 시골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 영월에서 보냈던 시간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ㅈ이 잠깐 아버지 산소엘 들리겠다 해서 나는 그러라 하며 냇가로 내려갔다.

옛날에는 여기서 배를 타고 아이들이 통학을 했는데 각동대교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어느 새 육중한 다리가 놓여 있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런데 누가 ‘혹시 이선생님이 아니냐’며 아는 체를 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내 제자라면 이렇게 늙을 나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고 선생님, 저 ㅎ예요” 하며 손을 덥석 잡는데 재학 시절과는 달리 키가 껑충 큰 데다 머리마저 벗겨져 마치 ㅎ의 부친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날은 순전히 잊혀진 나의 제자들을 찾아 나선 순례의 날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는 여행이라 할 수 있었다. ㅈ과 ㅎ도 오랜만에 만나는 눈치라 저간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침 ㅎ은 동창들 사이에서 총무 비슷한 역할을 하던지라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누르면서 “야! 느들 옛날 3학년 때 국어 가르치시던 이희수 선생님 생각 나냐? 지금 내 곁에 계시다. 통화 좀 해 봐라”며 호기 있게 전화를 넘겨주면 나는 ㅎ이 일러준 대로 “창립아, 영순아, 남경아” 목이 터지도록 옛 제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세월은 어느덧 한 세대가 지났건만 아이들과 나는 70년대 중반을 달리고 있었다.

수원서 사업을 한다는 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애의 목소리서 나는 떨림을 감지했다. 몇 번 어려움을 겪어 제 말로 아웃이 될 뻔했다니 어지간히 고생을 한 모양이다.

“아, 선생님 그때 미인이셨는데 지금도 아름다우신가요?”

물론 빈말인 줄 알지만 나는 그 소리도 싫지 않았다.

“얘 그때 동네 아이들과 밤에 별 보러 갈 때 네가 여학생들을 업어 개울을 건넜잖아. 기억나니?”

“그럼요. 선생님, 그 날 부르던 노래가사도 고스란히 떠오르는 걸요.”

어렸을 때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릴 줄 알던 ㄱ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옛날의 정중한 음성을 잃지 않았다.

옛 스승이 왔다고 이리저리 연락들을 해 얼마 되지 않아 제자들의 안사람들까지 나와 상을 차렸다. 내 생전에 이런 송구스러운 상은 처음이었다. 그때 ㄴ이 술을 한 병 들고 나타나 중3 때 막걸리를 마시다 나한테 들켜 혼이 났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배구선수로 날리던 그의 스파이크만 생각났다.

ㄴ은 여러모로 그 당시 또래들의 영웅 노릇을 하던 학생인데 세월의 풍상을 피할 수 없음인지 굵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한때는 건설 일도 보다가 요즘은 육가공 일을 보는데 특허를 출연중이라 했다.

왠지 이들을 보며 나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삶의 주역들을 만나는 중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아무리 살기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달픈 삶의 흔적을 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바쁜 일상을 핑계대며 어쩌다 학교에 관한 이야기라도 나올 양이면 ‘아! 나도 한때 학교에 근무했던 적이 있었어’ 하며 지나간 내 이력의 한 페이지를 떠올릴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선생은 고약한 선생이다.

그런데 불현듯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힘든 삶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나의 제자들을 보며 비로소 내가 그래도 선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년의 제자들을 보며 나는 가슴이 편치 않았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아이들의 인생살이가 수월치 않다는 점에서 그러했건만 정작 본인들은 즐겁다고 했다.

이렇게라도 한자리에 모일 수 있어 기쁘고, 잊었던 옛 스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그저 좋다는 것이다. 그저 큰 욕심 없이 소시민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이제는 함께 늙는다며 우리 아이들 결혼식 때 꼭 초대를 하란다.

영월에서 만난 나의 제자들, 비록 버젓하게 내어놓을 자리 하나 없어 부지런히 뛰어야 아이들 공부시키고 동창들 만나면 반가운 마음으로 술 한 잔 기울일 정도의 여유지만 이들은 정직했다. 왜냐하면 몸으로 살아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 또래 화이트칼라 계급의 사람들이 보이는 이중성이랄까, 무언가 회색빛 군중이 빚어내는 묘한 아크릴 문화가 없어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너희들 만나 참으로 좋았다. 앞으로는 너희들 문화에 적극 참여할께, 꼭 불러줘.”

“그럼요. 그럼요.”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ㅈ에게 나는 최근에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건강한 사람들을 만난 기분이라 했다. ㅈ 역시 이 또래 아이들에게 그동안 이방인 대접을 약간 받고 있었는데 오늘 그 벽이 무너져 기쁘다 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소도 버틸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도 생긴 모양이다.

빈곤의 대물림이란 말이 젊은이들을 족쇄처럼 옥죄고 있는 우리의 현실, 더러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고리를 끊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업무상으로 무수하게 만나는 나의 동료며 지인들을 통해 나는 이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는데 나는 정작 우직한 나의 제자들을 보며 그 질문의 중심을 짚어낼 것만 같았다.

힘들지만 그렇다고 체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아래서 건강하게 사는 이 아이들은 유학을 못 보내 안달을 하는 소시민들이 아니라 더 멀리 높은 하늘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푸른 눈을 가졌다.

 

내 아이들아, 힘들더라도 부도내지 말고 버틸 때까지 버텨라.

그리고 가정이 근간이니 이혼 따위는 하지 말아라.

그렇다고 너희들 몸이 부서질 때까지 미련 떨며 일만 하지도 말아라.

가끔은 영월에서 너희들이 보며 자랐던 봉래산이나 아름다운 동강, 그리고 어린 단종의 넋이 배어 있을 청룡포나 장릉도 잊지 말아라.

그래서 20리씩 걸어오느라 비가 오면 한 시간 이상씩을 지각해야 하던 네 또래 젊은이들이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추억을 훈장처럼 가슴에 간직하며 건강하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