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향기에 대한 기억

 

                                                                                            배용제

초여름, 산길 입구에 가득 핀 아카시아 꽃의 환한 향기가 코 속으로 스민다. 나는 다시 아득해진다. 매년 이때쯤이면 나는 아득한 그리움의 몸살을 앓는다. 내 몸의 감각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몰려간다. 새하얀 기억의 송이들…….

내 가슴 한편에도 새하얗게 피어 아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래 지워지지 않는 꽃향기처럼 배어 있는 진한 기억이다. 그러니까 28년 전, 중학교 1학년이던 내게 여자라는 이성의 이상형이 되어 지금까지 내 생에서 여자의 기준점이 되어버린 한 누나 이야기다.

고향의 작은 시골 교회를 다니던 어린 시절,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일학교에서 막 학생부 소속이 된 어느 봄날, 햇살 밖으로 삐져나온 꽃처럼 환한 그 누나를 처음 보았다.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던 누나는 언제나 단정한 학생복 차림이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왜 가슴이 뛰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수줍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랐다.

누나에 비해 많이 어린 내가 수줍어하는 게 귀여워 보였는지 누나는 웃음을 보이며 살며시 품에 안아주었다. 누나의 품에서는 아카시아 향기 같은 비릿한 젖내음이 풍겼다. 나는 그 냄새가 정말이지 어지러울 정도로 좋았다. 그 후로 누나는 나를 보면 곧잘 안아주었고, 언제나 그 환하고 단아한 웃음으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부터 누나의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누나를 보러 교회에 가는 것처럼 온통 내 감각은 누나를 향해 있었다. 그런 아카시아 같은 누나의 냄새, 누나의 미소, 누나의 따뜻함은 너무도 선명하게 내 가슴에 새겨졌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워지거나 잊혀지지 않았다. 이성을 보는 렌즈가 되어버린 누나는 완전한 내 이상이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는 성년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누나가 몹쓸 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교회도 나오지 않았고, 집안에만 누워 지낸다는 소식에 얼마나 가슴이 메어졌던지.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초여름 어느 날 교회에서 누나를 보았다. 그렇게 예쁘고 환했던 얼굴이 사라지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으로 숨쉬기도 힘겨워하는 누나를 보는 게 얼마나 아프던지. 자전거에 태우고 누나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길가에 만개한 아카시아 향기는 왜 그리 진하던지. 힘겨워하는 누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몇 걸음 걷다 쪼그려 앉아 쉬기를 반복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끌었다.

동네 입구, 일직선으로 길게 뚫린 길에서 나는 멈추어 섰고, 누나가 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아카시아 꽃송이들처럼 누나는 중간에 뒤돌아서서 가만히 웃어주곤 그렇게 사라져갔다. 며칠 뒤 나는 누나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해가 질 때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그 누나를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 누나의 눈빛으로, 누나의 체온으로 세상을 보고 움직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너무 진하게 가끔씩 가슴에서 솟아나는 그리운 아카시아 향기만큼. 그만큼.

 

시인. 시집으로 『이 달콤한 감각』,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