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외과 의사의 업보인지 축복인지

 

                                                                                             왕규창

영화나 TV 드라마에 간혹 의사가 주연급 역할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실제 의사들 숫자에 비하여 자주 등장하는 전문과목들이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다양한 인생살이를 접하기 때문에, 산부인과는 여성만을 접한다는 것, 그리고 상당히 은밀한 이야기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주 나온다. 이에 못지않은 전문과목이 신경외과와 흉부외과이다. 이들은 의사들의 삶 자체가 좋게 이야기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달프다. 또 삶의 끝자락에 매달리는 환자와 보호자들을 보면서 늘 삶을 새로이 돌아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삶의 끝자락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신경외과 교수의 한 사람으로 인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과목 소개 시간에 이런 점을 신경외과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절벽의 끝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힘이 든다. 그러나 그 절벽 아래에 펼쳐지는 모습을 더 깊이 맛볼 수 있다. 직업상 팔자가 센 사람들의 위안일까? 적지 않은 환자들이 의학과 의사들의 한계를 넘어 저세상으로 간다. 처절히 매달렸다가 아쉬움 속에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환자, 새벽의 피로한 무영등 불빛, 뇌리에 남는 얼굴들. 그런데 그런 것들 뒤에는 지금도 가슴 아프도록 ‘슬픈 아름다움’도 있다.

 

25년 전 겨울, 나는 신경외과 전공의 1년차를 마쳐가고 있었다. 그 달은 유난히 당직 업무가 험했다. 이틀마다 당직을 하는데, 이미 예정된, 때로는 예기치 못한 환자 사망을 거의 매번 당직 때마다 맞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게 입원환자가 한 명 배정되었다. 33세 남자, 나이에 맞지 않게 이마가 넓고 키가 훤칠한 점잖은 사람이었고, 아내도 매우 교양이 있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잘 나가는 기업의 앞날이 유망한 직원이다.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방사선 치료 등도 받았으나 종양이 계속 자라 입원하였다. 담당 교수님이나 나나 보호자 그리고 환자도 모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환자는 경구 투약에도 불구하고 두개내압(뇌압)이 높아 심한 두통을 호소하여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하여야 사용이 가능한 약으로 만니톨이라는 수액이 있는데 이를 주입하면 수 시간 동안 두개내압을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 그 효과는 없어진다. 한동안 환자가 두통을 호소하면 만니톨을 주입하여 고통을 경감시켰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그 효과도 줄어들었다. 이제는 만니톨을 주입하지 않으면 환자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이때 만니톨을 주입하면 의식은 돌아오지만 환자가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도 이런 경우의 만니톨 주입이 적절한 치료인지 아니면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고문인지 혼란스러웠다. 환자 보호자들도 알고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지켜보던 보호자들이 나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그만 합시다. 우리가 마지막 만니톨 주입을 요청할 테니 그 이상은 주입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데 이 후에는 어떻게 되지요? 오래 가나요?”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담당 교수님 등과 상의하여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날 밖에는 정말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닌 우산에서 물이 떨어져 군데군데 젖어 있었고, 방문객들이 입은 스웨터에는 땀처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1인용 병실이 눈에 선하다.

예정된 마지막 만니톨 주입. 역시 환자는 의식을 찾았다. 그러나 그 환자는 심한 두통으로 다시 신음하였다. 아내가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환자의 귀에 입을 대고 조용히 무언가를 이야기하였다. 환자의 신음은 멎었고, 환자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그래, 그들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방을 나왔다. 그들에게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순간에 불청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의 경과는 길지 않았다. 한 이틀 후 환자는 숨을 거두었다. 아내와 보호자들의 평안한 얼굴들. 그렇게 그들은 환자와 작별하였다.

 

나는 오랜 버스나 기차 여행을 하면서 잠에서 깨면 몇 가지 단어를 떠올린다. 마음의 평화, 행복, 기쁨, 사랑, 보람… 비슷비슷하지만 느낌이 조금씩 다른 단어들. 그 단어들 하나하나를 씹다 보면 문득 지난날 내게 삶을 가르쳐주고 떠난 사람들의 생각에 젖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소위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자의 업보인지 축복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