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實話) 이칙(二則)

 

 

                                                                                           李應百

첫째 이야기

 

어느 과수댁이 아들 형제를 두었다. 비바람 눈보라를 무릅쓰고 그 애들의 뒷바라지를 해왔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맏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이제 힘든 의무를 수행했다고 자위(自慰)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토록 애쓰시는 것을 마음에 담아서인지 맏아들의 고등학교 성적이 출중하여, 만약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더라면 응당 대학에 진학시켰을 것이라는데 상도(想到)하니 등에 땀이 쪼르르 흘러, 다시 이를 악물었다.

맏아들은 무난히 일류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대학의 학비는 고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벅찼다. 모든 사정을 익히 아는 주위의 도움에 힘입어 첫 학기의 등록을 끝낼 수 있었다. 다행히 대학에서도 성적이 출중해 2학기부터는 장학생이 되어 한숨을 덜어주게 된 것이 무척 고마웠다.

그런데 뒤미처 고교를 졸업한 둘째아들도 공부를 잘해 그냥 버려두면 형과 차별대우 하는 것 같아 젖 먹은 힘을 몰아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이제까지 했는데 하면 될 것이라는 소신이 솟은 것이다. 그러자니 남들이 가는 봄, 가을 꽃과 단풍놀이를 아예 염두에 둘 여지도 없이 날마다 바쁘게 지내야 했다.

다행히 큰아들은 중·고교 교사 자격증을 얻어 무난히 학교에 취직이 되고, 둘째아들도 일반 회사에 취직이 되어, 월급날이면 둘이 월급봉투를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얼마간씩을 용돈으로 드렸다.

과수댁은 그때까지의 고생을 한낱 꿈으로 돌리고 현실적인 만족을 맛보게 되었다. 한 눈 팔지 않고 종교처럼 열중해온 보람을 느껴, 그것이 청춘을 불살라 핀 꽃이라고 생각했다.

맏아들은 학교에 착실히 근무해서 좋은 규수(閨秀)와 인연이 닿아 성취(成娶)를 해 온 식구가 단란히 지냈다. 그 동안 둘째아들도 성취를 해 가까운 거리에 따로 세간을 냈다.

큰아들은 근무 성적이 좋아 특별히 발탁되어 일본 동경 한국대사관 장학사가 되어 내외가 그리로 파견됐다. 재일 한국학교의 장학도 중요하지만 본국에서 출장간 이들 뒷바라지로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좋은 평이 들려올 때마다 한국의 어머니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 친구들에게 그것을 자랑했다.

한 일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올 예정이 잡혔을 때, 어머니는 큰아들 내외가 들어가 살 집을 아들 명의로 짓기로 작심作心했다.

이제까지 살던 집을 허물고 터를 넓혀 아들 내외가 어연번듯하게 차지해 살게 하고, 자기 방은 문간에 자그마하게 꾸미기로 했다. 날품삯으로 맡기면 일일이 감독하기도 어렵고 해서 도급(都給)을 주었으나, 평생 자기 손으로 짓는 첫번째 작품이라 조금도 마음에 거슬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현장에 나가 크고 작은 잔소리를 퍼부었다. 도급을 맡은 이가 알아서 책임질 일도 막무가내로 일일이 간섭했다. 어떻든 집이 얌전하게 준공이 되어 큰아들 내외가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와 살 날을 기다렸다.

친구나 친척들이 새로 지은 집 구경을 하고, 야무지게 잘 지어졌다고 칭찬을 하면서, 안채에 아들 내외가 덩그렇게 차지하고 시어머니는 문간방 신세가 되는 데 대해서는 별 찬성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무슨 대수냐고 했다. 어머니의 속셈으로는 내가 그토록 애써 지어준 집이니 안방 차지할 것을 황송하게 느끼며 저희들이 문간에 들겠다고 해도 그러지 말라고 할 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드디어 동경에서 큰아들 내외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며느리가 선두에 서서 자기네 명의로 된 자기 집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당당히 안방으로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한 것이다. 애써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새려, 문간방의 시어머니에게 신을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했다. 문간 신방돌에 시어머니의 신이 놓인 것이 남의 눈에 뜨이는 것이 어색하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식사 때는 식구가 한방에 다 모여서 드는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 밥은 감방(監房)에 사식을 들여보내듯 따로 차려 문간방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둘째 이야기

 

내외간에 금실(琴瑟)이 좋던 부부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게 됐다.

어머니는 아들 부부를 머리맡에 불러놓고, “일반적으로는 여자가 뒤에 가는데, 어쩌다 내가 먼저 가니 네 아버지 연세로 보아 속현(續絃)은 하실 수가 없을 것이니, 너희 내외가 나 본 듯이 잘 모셔야 한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들이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어머니 그걸랑은 조금도 걱정 마세요. 저희 내외가 어머니께서 생존시에 잘 챙겨드리지 못하셨던 점까지 충분히 성심껏 잘해 드릴 것이니, 어머니는 마음을 놓으시고 눈을 감으세요” 했다.

어머니가 운명(殞命)하고 초종(初終)을 치른 뒤, 아들 내외는 안채 차지를 하고, 아버지를 문간방에 거처하게 했다. 그리고 식사 때 안방으로 모시어 단란하게 드는 것이 아니라 문간방으로 따로 차려다 드리는데, 그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배시계는 끼니때가 되면 쪼르륵 소리가 나는데, 감감 소식이니 밥이 들어오면 소화를 시키려고 준비된 위액이 헛되이 위벽에 손상을 입힌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위궤양(胃潰瘍) 증세다.

그 날도 식사는 차려줄 생각을 안 하고, 며느리가 아무 변명도 없이 휭나케 외출을 해 버렸다. 시아버지는 기가 막혀 무심코 며느리 방에 들어갔는데, 마침 가계부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가 들춰보았더니 어느 날짜에 ‘촌놈 용돈 2만 원’이라고 적혀 있더란다.

시아버지는 그 날로 그 집을 나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杳然)하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