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윤모촌 선생 추모 좌담회

 

 

일시`:`2005년 7월 8일

장소`:`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김태길·김시헌·허세욱·이정님

사회 및 정리`:`이경은

 

 

사회`:`안녕하십니까? 문우회 원로 회원이셨던 윤모촌 선생께서 지난 5월 7일 토요일 오전 8시, 오랫동안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시다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문우회 원로 회원 세 분과 그 밑에서 사숙했던 두 사람과 함께 선생의 문학과 선생께서 살아오신 길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윤모촌 선생님의 연보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윤모촌 선생의 본명은 윤갑병(尹甲炳)으로 1923년 8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44년 연천공립농업실수학교를 나와, 경기도 고양군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이후 교육 관계의 신문 잡지계에서 근무하였으며, 태양신문에 시를 발표하고, 전쟁이 나자 국민 방위군으로 마산까지 내려갔다가 북상하면서 대전 <호서문학> 회원이 됩니다. 1979년 56세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오음실 주인’이 당선되어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필집 『정신과로 가야 할 사람들』, 『서울 뻐꾸기』, 『발자국』, 『촌모씨의 하루』가 있으며, 선집으로 『산마을에 오는 비』, 『오음실 주인』, 실기와 이론서로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있으며, 대략 2백4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분을 ‘선비 수필가’로 말했는데, 이런 점에서 그분의 인격과 생활에 대해 말씀을 해주십시오.

김태길`:`수필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수필을 대하는 사람으로, 자기가 좋은 수필을 쓰고, 좋은 잡지에 자기 수필이 실리고, 한 마디로 말하면 개인주의적인 견지에서 수필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시야를 넓게 해서 한국의 수필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수필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윤모촌 선생은 한국의 수필계 전체를 항상 염두에 둔 그러한 수필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수필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쓰는 수필가 중에도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넓게 시야를 갖되 수필계를 이용해 돈을 번다든지 자기의 세력을 펼치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윤모촌 선생의 경우는 그쪽이 아니고, 한국 수필의 위상을 넓히고 한국의 수필인들이 훌륭한 수필을 쓰기에 맞는 인격 갖기를 원한 선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윤모촌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속됨이고 속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상 타기를 좋아한다든지, 자기 이름을 앞에 내세우려고 하는 속된 사람, 그러한 수필가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깨끗한 사람, 맑은 수필가를 좋아했습니다.

김시헌`:`윤선생님이 수필반을 여러 개 담당하셨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못하게 된 반을 제가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학생들을 통해서도 윤선생님이 느껴져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고, 가르친 말들을 마음에 잘 담고 있어요. 그것을 보고 역시 글보다 인간이다. 인간이라는 말을 워낙 강조를 하다 보니 학생들까지도 그런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세욱`:`저도 기억나는 점이 있습니다. 서예와 한시를 좋아해서 저하고 가끔 만나서 한시 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특히 한시 속에 매화가 들어간 글을 좋아하셨죠. 매화의 특색이란 게 추울 때 피어 고고하며, 앵두꽃이나 살구꽃 등 속기(俗氣) 나는 많은 화려한 꽃들과 함께 피지 않는 꽃. 그분의 이런 기호를 통해서도 인격의 일단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아까 우송 선생께서도 강조하신 ‘속물’을 극히 싫어했습니다. ‘속물 타기(唾棄)’가 이분 인격을 얘기하거나, 심지어 문학을 말함에도 첫째가 아닐까 합니다.

또 하나 추억담은 제가 <계간수필> 편집 일을 맡으면서 체험했던 일인데, 최근 거의 한 5년 동안에는 원고를 보내시면서 그 밑에다가 꼭 ‘이게 제 마지막 작품입니다’라고 쓰셨어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비장한 각오이며 동시에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의식을 표시한 장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들을 때마다 전화로 농담을 했습니다. “선생님. 엄살 부리지 마세요. 아무 걱정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껄껄 웃으셨는데, 거기에서도 역시 책임 있는 인격의 단면을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정님`:`저희 파주문학회에서 스승으로 모신 지가 햇수로 18년인데, 선생님은 처음에는 엄하신 시아버님 같은 인상으로 다가오셨어요. 그러다가 차츰 친정아버지같이 따사롭고……(목이 메는). 글을 배운다기보다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허세욱`:`김시헌 선생님, 두 분의 교분이 깊은 걸로 아는데요?

김시헌`:`편찮으시기 전에는 서로 연락해서 만났고, 편찮으신 뒤에는 전화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찾아갔어요. 어떨 때는 전화로 놀러 안 오시렵니까 하면 그땐 바로 그 이튿날 가야 돼요. 미안해서요. 가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저보다 더 얘기를 많이 하셔요. 피로하실 텐데도요. 그런데 얘기들이 대부분 공적인 문제, 비판적인 것, 어떤 것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고 있다는 식의 내용들이에요. 늘 옆집에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매일이라도 가고 오고 맘대로 할 수 있는데 하셨지요.

신의. 한번 마음에 가진 신의는 설사 그 중간에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우정에 있어서 문제를 삼지 않았고, 신의가 워낙 뿌리가 깊어 ‘저 사람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이 확 느껴와요. 사람을 믿어준다는 느낌. 그걸로 같이 지내왔어요. 서울 와서 지금 14,`5년쯤 되는데 비교적 많이 만난 편입니다.

허세욱`:`그분이 선생님 말고는 어효선 씨와 교분이 깊었던 것 같은데요?

김시헌`:`네. 그분 얘기를 자주 했어요. 소설가 하근찬 씨 얘기도 많이 했어요. 집 벽에 어효선 씨 그림을 많이 붙여놓았고, 수필집 『산마을에 오는 비』, 『발자국』, 『촌모씨의 하루』에 표지화로 삼기도 하셨지요.

허세욱`:`거기에서도 그분의 일면을 볼 수 있어요. 어효선 씨가 우리 <계간수필>의 표지를 한 일 년 정도 그려주셨는데, 그 그림의 소재를 보면 늘 문방사우를 떠나지 않았거든요. 붓, 벼루, 기껏해야 매화 조금. 그래서 어효선 선생도 필시 저분과 같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까 그런 짐작도 해 봅니다.

김태길`:`나는 그분보다 3년이 많은데, 처음에는 그가 나를 자주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가깝게 왔다갔다 못했어요. 내가 늘 바쁜 편이라, 그분하고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가 없었거든요. 결국 나하고의 교분은 그런 정도로 그쳤지만, 속으로 나는 참 그분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만나면 항상 개인적인 얘기보다는 수필계의 얘기를 많이 했는데, 개인적인 얘기라면 나보고서 글씨 하나를 써달라고 한 것이 생각나요. 내가 알기에 그분은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연습을 해 가지고 써주겠다고 했죠. 그리고 나에게도 하나 써달라고 했는데, 서예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미루다가 결국 저도 못 써드리고 모촌의 글씨도 얻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교분은 뭔가 미완성으로 그친 그런 아쉬움이 있어요.

허세욱`:`저는 어른이기 때문에 몇 번 명을 거절하다가 써드렸습니다.

김시헌`:`전에 13층에 사실 때 문병을 가면 지팡이를 짚고 기어이 내려오십니다. 힘드실 텐데 나오지 말라고 하면 이렇게라도 운동을 해야지 하면서 밑에까지 내려오세요. 뒤돌아보면 안 보일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고 계셔요. 그런 모습이 지금까지 마음에 찡하게 남아요.

허세욱`:`제가 편집자라서 유작 ‘실낙원’을 먼저 읽었는데 작품이 정말 찡했어요. 그 작품 속에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고, 죽음에 대한 예시도 많이 나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네 줄에 또 사회비평을 하는 거예요. 세상이 동물을 닮아가고, 인륜이 깨진, 그래서 실낙원이 돼 버리는, 그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의 유작이 될 거라는 것을 짐작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까 문학과 그분의 인생이 거의 일치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사회`:`특히 품격과 품위에 대한 얘기를 많이 강조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이런 품격이 문학사상에는 어떻게 나타났는지요?

허세욱`:`제가 예전에 ‘정신과로 가야 할 사람’, ‘서울 뻐꾸기’에 관한 평을 써달라고 해서 쓴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목을 ‘수졸(守拙)과 택선(擇善)의 문학’으로 잡았습니다. 택선은 공자의 유가적인 행위규범이요, 수졸이 속기를 벗어나고 세상의 명리를 초월한 것이라면, 이분의 문학은 유가에서 출발해서 도가로 나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 예로서, 고향을 사랑하고 특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실향의 설움과 나라에 대한 걱정, 불의와 부정을 질타하는 부분은 모두가 유가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이분의 이런 유가적인 것은 철학가적이거나 종교가적인 것은 아니고, 일종의 선비의 지사적인 강개 같아요. ‘신 팔불출론’, ‘자존심’, ‘시인 임종국’, ‘수필인의 격’ 이런 작품들이 모두 이런 계열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분이 이렇게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면서도 늘 반면이 있습니다. 무명과 무위, 은일, 탈속, 친자연 등인데, 그 목적은 역시 속물은 싫다는 것이죠. 제1회 수필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강연 원고에서도 역시 문단의 아첨과 오만, 후안무치한 인간상들을 질타했어요.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실 적극적인 참여인데, 그러면서도 늘 뒤돌아서는 거예요. ‘반벙어리의 여운’, ‘아낙군수’, ‘홍은동 참새’, ‘서울 뻐꾸기’ 등이 도가에서 나온 작품들로 볼 수 있는데, 거의 다 뒤돌아서서 초극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분이 어려서 한문 사당에서 책을 읽었고, 가정환경이나 교육이 아주 다분히 유가적이고 한학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해서, 지사적인 습속을 많이 익힌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나중에 현실과 갈등이 생기고 좌절이 생기니까 거기서부터 도가적인 사고로 돌아서지 않았나 저는 내다봤습니다.

김태길`:`대쪽 같은 사람이고 시비를 가리면서 수필계를 꾸짖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편 익살도 있고 때때로 유머도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그분의 딱딱하고 대쪽 같은 것을 유화하는 면이죠.

김시헌`:`저도 윤모촌 론을 하나 쓴 게 있어요. 첫째로, 선생은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이 분명하며, 그런 눈으로 현실을 보는 면이 수필과 이야기 속에서도 많이 나오죠. 반일 사상이 아주 강해서 일본엔 간 일도 없고 절대 안 가겠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하나는 유교 전통 정서가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실향의 아픔이 은근히 글 속에도 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필화사건이 한 번 있었는데, 그 모양으로 비판을 해도 적극적으로 하셨어요.

이정님`:`선생님들께서 엄한 선비 같다고 하셨는데, 그런 반면에 어린아이같이 소박하시고 따사로운 면도 많았던 분이세요.

허세욱`:`궁금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깐깐한 분이 문단에 나온다는 것도 일종의 영합인데, 그 나이 56세에 신춘문예에 투고해서 문단에 나오셨거든요. 사실 그 나이로서는 하기 어려운 용기였을 텐데요.

김태길`:`수필에 대한 정열이 강했던 거지요. 누구에게나 양면이 있는 거지요. 숨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또 나오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수필에 대한 정열이 강하니까 한번 세상에 나오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던 거죠.

 

사회`:`이분의 수필이 깐깐한 선비 수필가의 것이라면, 문장 수사나 기교, 표현, 구성, 용어 사용 등으로 본 그분 수필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김태길`:`수필인의 격을 매우 강조했는데, 사실은 수필의 격도 많이 따진 사람이에요. 수필은 역시 격에 맞게 써야 된다. 예를 들면, 문단 나누는 것도 함부로 나누면 안 되고, 구두점 찍는 것도 제대로 찍어야 된다. 그게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의 수필계라고 하면서, 수필을 어떻게 써야 되는가에 대해서 수필문우회와 여러 사람의 힘으로 책을 한 번 내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여러 사람이 합해서 하기는 어려우니까 윤선생이 혼자서 써보라고 권고를 했어요. 그래서 쓴 것이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예요. 수필의 격을 그렇게 따진 분입니다.

김시헌`:`『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수필작법 책 중에서 아주 일찍 나온 책이에요. 지금도 새로 수필을 공부하는 반에서는 그 책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안의 예문이 많아요. 장점과 단점도 잘 지적되어 있고요.

허세욱`:`특히 수필의 ‘산문정신’을 강조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모든 것을 망라하는 모범적인 해답이라기보다는 윤모촌 식 산문정신 같아요. 그분이 주장하는 것은 대개가 분식, 과장, 상징, 추상, 이러한 문장들을 다 반대하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개념으로만 진술된 것을 강조하시는 거죠.

김시헌`:`문장의 허구 논쟁이 있을 때, 그분은 작품 그대로 써야지 거기에 조금이라도 허구를 넣어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허세욱`:`문장의 ‘간결’을 추구하셨죠. 요즈음 허구적인 글도 된다는 허구에 대한 절충론들이 상당히 머리를 들고 있는 시점인데, 反허구론들의 진영에서는 대단한 전사를 하나 잃은 셈이에요. 이분은 그 점에서 확고했거든요. 허구적이란 것도 절대 안 된다.

구성이나 기교 문제에서 볼 때 ‘촌모씨의 하루’에서 자기 호를 거꾸로 붙여가지고 해학적으로 자기를 관조하는 얘기, 이것은 그 양반이 가시기 전에 기교를 최고로 발휘한 작품 같아요.

김시헌`:`그리고 수필반을 여러 곳을 담당했는데 추천을 잘 안 해요. 요즈음은 추천을 많이 하는 경향인데, 지금 지도를 맡은 사람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요.

허세욱`:`예전에 모촌 선생과 김시헌 선생이 <계간수필>에 편집위원으로 계실 때, 이 두 분은 자기가 가르친 제자 작품이 나오면, 심사할 때 발언을 안 하시거나 아예 나오시지를 않으셨어요. 그렇게 책임 있고 맑았던 분들이에요. 전 이런 부분을 참 기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문우회를 지독히 사랑했고 긍지를 가지셨어요. 최근 출석을 잘 못하신 5년 동안에는 꼭 신입회원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거기에 대한 평가를 하셨어요. 그런 것을 보면 애증이 분명했던 분 같아요.

김태길`:`문우회에 못 나온 날은 그 작품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써서 보내기도 하셨지요.

 

사회`:`이제 마무리로서 그분의 ‘인격과 문학’에 대에 총평을 해주세요.

김태길`:`그것보다도 내가 유감이라고 할까… 내가…(목이 메다가 눈물 훔치시는) 작고하기 전에 한번 가보겠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못 가본 것… 그게 한이 돼요. 그 수필 세미나 때에 ‘수필인의 격’을 강의하고 헤어질 때에 뒤에 나도 따라 나갔는데, 이 양반이 나하고 작별하려고 일부러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시고. 나는 그게 마지막이 안 되게 하리라고 생각하고는 결국 못 갔어요.(분위기 일순 숙연해졌다)

허세욱`:`저는 가시기 전에 자주 전화는 드렸지만 가 뵙지는 못했습니다. 참으로 죄송스러워요. ‘촌모씨의 하루’를 낸 뒤에 전화를 주셨어요. 저한테 서평 대신 광고 문안 하나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쓴 걸로 저는 그분의 인격과 문학을 아우르는 말로 대신 하려고 합니다.

‘모촌 선생의 글은 선비다운 글이다. 선비의 품위와 수필의 격을 일체화한 글이다. 편벽하리만치 택선 고집할지언정 속물을 타기했고, 건조하리만큼 군소리와 수식어를 저주할지언정 나아갈 때 시원스레 나가고, 쉴 때 당장 멈춘다. 그분도 어느덧 귀착을 감지하고 있다. 아! 하늘이 비었다.’

김시헌`:`한번은 가니까 대화자가 필요하다. 파킨슨씨병 때문에 받는 고통보다도 아무 얘기도 못하는 게 더 고통스럽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정님`:`파킨슨씨병으로 거의 10여 년을 고생하셨는데, 저희와 공부를 할 때 한 번도 시간을 어기신 적이 없어요. 나중엔 병이 깊어 일어나기가 힘드실 지경이었는데도, 부축을 해서 소파에 앉으셔서 가르쳐주셨죠. 5~6월에는 강화를 모시고 가서 밴댕이회를 사드렸어요. “내년에도 밴댕이회 꼭 먹으러 와요” 하면, 어린 소년처럼 웃으시면서 “그래,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씀하셨어요.

허세욱`:`올해에는 결국 밴댕이회를 못 드셨네요.

이정님`:`네. 올해는 못 드셨어요. 선생님이 조금만 더 계셨으면 드시고 가셨을 텐데……. 그리고 선생님이 대학병원에 장기 기증을 하신 것, 그 연세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었는지.

이정님`:`살도 하나 없으신 그분이 어디서 어떻게 쓰여질까 생각하면, 이해를 하다가도… 가슴이 아파요. 보존 기간이 한 이 년 걸린다는데, 유족과 의논해 화장을 해서 고향 가까운 고랑포 쪽으로 모시고 가 뿌려드리자고 회원들끼리 얘기했어요.

허세욱`:`사실 이제 저 어른들 다음 세대가 전데, 저희 세대에는 그런 격을 갖춘 수필집이 있을까 되돌아봐도 걱정이에요. 윤모촌 선생은 후배로서 참 기릴 만한 수필가이셨습니다.

김태길`:`한 마디로 우리 시대에 아주 드문 선비다운 수필가였어요.

 

사회`:`이것으로 윤모촌 선생 추모 좌담회를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