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失樂園)

 

 

                                                                                   윤모촌

천방지축(天方地軸) 세상 물정(物情)을 모르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갈등과 변화하려는 세력과 이를 저해하려는 세력 간의 다툼을 모르던 때가 그립다. 그때로 돌아가 가난에 허덕여 찢어진 고무신짝을 벗어내 던지지 못한 일들이 오히려 아프고도 정겹게 다가온다.

여우가 죽을 땐 태어난 곳을 향한다던가. 앉으나 누우나 고향산천의 이 골짝 저 산모퉁이 오솔길을 따라간다. 낮은 산자락과 논배미 따위에 붙여진 이름도 흘러간 시간을 짚어보게 한다. 냇물이 합수(合水)된 웅덩이에 개구리처럼 뛰어들던 곳, 인가(人家)도 거치지 않아 맑게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 마시던 곳, 이런 곳이 사람 살 곳인 줄도 모르면서…….

마을 꼭대기에 자리잡은 내 집 뒷동산엔 철따라 꽃이 피었다. 축동(築土同)을 멀리 내려다보면서, 사흘에 한 번 오는 우체부를 보곤 했다. 제복이 양복이어서, 처음 보는 아이들의 눈엔 신기하였다. 소년 시절 시골은 그런 모습으로 조용하였다.

축동 끝 언덕 위엔 고목이 울창해서 철따라 찾아드는 새들의 낙원이다. 뻐꾸기, 꾀꼬리, 붉은 댕기로 치장한 딱따구리 등이 새끼를 쳤다. 이따금 딱따구리가 고목을 쪼아대는 소리가 마을의 적막을 깼다. 물 논에 봄볕이 한가로우면 황새가 먼저 와, 우리가 건져 먹을 우렁이를 다 먹어치웠다. 이렇게 딱따구리나 황새를 보아오던 내게는 귀 설지 않은 익숙한 놈들인데, 요새 이것들의 씨가 말라 사라져간다고 하여 야단법석이다. 과학이 발달하니까 할 일도 많은 세상이 되고, 그놈들이 사람보다 대우를 더 받는 꼴이기도 해서, 바뀌는 세태에 입안이 씁쓸해진다.

산야에는 먹을 것이 있었다. 논두렁의 싱아와 찔레도 꺾어 먹고, 달게 익은 오디를 따먹었다. 8㎞를 오가는 학교길 묵은 밭에서, 산딸기[복분자]도 많이 따먹었다. 이렇던 것이 지금은 모두가 돈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아득한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곤 한다.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답던 진달래에 취하곤 한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이다.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흙으로 짓지 않고 시멘트와 벽돌로 지은 집들이었다. 물을 사먹는 일도 기이하였고, 어딜 가나 옥로수(玉露水) 같은 물을 마음껏 마시던 일을 생각하면서, 별세상에 왔구나 하였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한낮에도 대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다. 날이 밝으면 밤이 이슥할 때까지 잠그지 않았던 시골 버릇으로,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았다. 어린 속으로 생각하기에도 인심이 야박하였다.

할아버지의 거처인 사랑채는 항상 개방되어 있었고, 해가 저물면 누구나 길 가던 사람이 쉬어갔다. 그때의 나들이옷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흰 두루마기였다. 그런 옷을 입은 길손을 보면, 사람을 의심하지 않던 때여서 어린 마음에도 정겨웠다.

지금 나는 유약(柔弱)한 어린 시절을 회고적 감상으로 그리고 궁핍하던 시절을 미화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회고적 감상이 아니고 유약한 미화도 아니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잃은 듯 세상이 동물을 닮아가고, 인륜이 깨진 까닭이다. 사람들은 안락의자에 앉아 지구 반대편 사정도 손바닥 보듯 하면서 더없는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믿는다. 그런데 궁상맞은 얘기를 왜 하느냐 하겠지만, 세월은 이미 구원받지 못할 곳으로 떨어졌다. 살인을 하고도 죄 지은 줄 모르고, 거금(巨金)을 훔치고도 예삿일로 여긴다. 아직도 가슴에 뒷동산의 꽃들이 보이지만, 신기루가 된 채 먼 곳으로 사라졌다.

누님들이 오르내리며 산나물 뜯던 동산``─``그 동산에, 도시를 스친 바람이 분다. 사람이 없는 그 동산에 낙엽처럼 윤리의 시체가 쌓인다.

(200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