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혼여행(金婚旅行)

 

 

                                                                                            韓炯周

서양(西洋) 풍습에서 결혼 50주년을 축하하는 의식을 Golden Wedding(金婚式)이라 하고, 60주년은 Diamond Wedding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부부가 함께 맞는, 혼례한 지 60돌 되는 날을 회혼례(回婚禮)라 칭하고 큰 잔치도 하는데, 50돌 잔치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나와 아내는 1955년 4월 11일 서울에서 결혼하고 금년에 금혼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례사의 말씀대로 이제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변하였다. 지나온 세월이 짧게도 느껴지고 길게도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은 6·25 동란 중인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그 해 나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가교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아내도 그곳에서 S여대를 나왔으니 우리는 졸업 동기생이다. 나이는 내가 25세 아내는 23세, 나는 의예과(醫豫科) 2년의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내가 2년 연상이다.

당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육군 군의관 중위로 현지 임관되어 광복동에 위치한 육군병원에 배속되었고, 아내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용두산 기슭에 자리잡은 N여고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 해 초가을 나의 친한 중학교 동기생 박군의 결혼식이 있었고, 나는 신랑의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그때 아내는 신부의 들러리를 서게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었다.

슬쩍 곁눈질해 본 아내의 첫인상이 수더분한 것이 우선 마음에 들었고, 첫 인사에서 부드러운 웃음과 음성에 관심이 갔다.

 

가을도 깊어가던 어느 날 우리는 그 날도 다방에서 차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며 밤거리를 거닐다가 영도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밤 항구의 불빛은 잔잔한 바다 위에 어른거리고 상쾌한 산들바람이 두 여인의 얼굴을 스친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옆에서 한 걸음 뒤져 따라오며 속삭이는 여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처음 잡아 본 손이다. 순간 여인은 몸을 움츠리고 쑥스러워서 옆으로 게걸음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해 12월, 중부전선에서 중공군(中共軍)과 대치한 6사단에 전속 명령을 받았다. 철원 북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헤어질 때 나는 늘 만나던 금잔디다방에서 ‘다시 만나는 날까지!’라는 사인을 수첩에 남겨주고 이별을 고하였다. 다음 날 아침 떠나는 기차 정거장에는 그녀가 나오지 않았다. 이별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사단에서 곧 연대로 배속되고 그로부터 수개월간, 이삼 일에 걸러 벌어지는 치열하고 처참한 야간 전투에 연대 의무대장으로서 생사를 넘나들며 참전하였다.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과 편지를 주고받는 기쁨이 있었기에 그 엄청난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후 1년이 지나면서 우리들은 서울에서 다시 데이트를 즐기게 되었다. 운명의 여신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전방에서 경복궁 옆에 위치한 수도육군병원에 전속되어 서울에 왔으며, 아내는 D여고로 전근되어서 이미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회고컨대 우리들은 3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였다. 그 후 결혼생활도 비교적 순탄하였다고 생각되며, 무엇보다 현재 우리 두 사람의 건강이 양호하여 일상생활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치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즐겁고 기쁜 이틀간의 금혼여행을 다녀왔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결혼이란 서로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란 말이 있다. 5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나로서는 새삼 아내가 고맙고, 지나온 세월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금혼식을 맞으면서 무엇인가 자축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간 상의를 거듭하면서 드디어 금혼여행을 떠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행선지는 추억어린 부산이고, 차편은 고속 전철.

 

금혼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낭만적인 느낌이 들어서 나쁘지 않았다. 지난 5월 초순 어느 날, 아침 아홉 시 서울역에서 고속철에 몸을 실으니 차는 시속 300Km의 초고속으로 질주하였다. 우리들은 2시간 40분의 주행 끝에 어김없이 부산에 도착하였다. 역전에서 택시를 타고 예약된 해운대의 호텔로 향하였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부산 거리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였다. 50년 전의 부산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관광택시의 안내를 받아 부산의 동북부 일환을 돌아보았다. 송도해수욕장도 들러보고, 마침 석가탄신일을 축하하여 길가에 줄 서서 대롱거리는 연등에 이끌려 장안사(長安寺)를 위시하여 몇 곳의 사찰에도 발을 옮겼다. 오륙도에 가 보니 그 모습은 예전과 변함이 없어 반가웠다. 드디어 부산 앞바다에 어둠이 깔리면서 전장 7.5Km의 광안대교(廣安大橋)에 장식된 무수의 전등이 켜졌다. 뒷산에 올라가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보니 그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저절로 났으며, 과연 부산의 명물임을 실감하였다. 저녁에 밤하늘의 별을 보며 파도 소리를 벗삼아 마음은 청춘으로 돌아가 해운대 해변을 산책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머지 서남부 일환을 돌아보았다. 용두산공원에 오르고, 자갈치시장에도 들르고 광복동에 도달하였다. 그 시절 그토록 낭만이 넘치고 화려했던 번화가의 모습은 어디 가고, 광복동 거리는 초라하고 좁다란 골목길처럼 보잘것없이 변모하고 있었다. 세월의 뒷켠에 밀려난 광복동 거리의 모습에서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의 자화상을 떠올리며 쓸쓸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새로 놓인 현대식 교각인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 땅에 들어섰다. 태종대 일환을 둘러보고, 점심식사는 ‘복국 잘한다’고 알려진 식당에서 본 고장의 맛을 즐겼다. 영도를 벗어나 되돌아오는 길에 옛날의 낯익은 추억어린 영도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다리의 중간에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53년 전에 걸었던 다리 위의 그 길을 나란히 걷게 되었다. 나는 생각이 나서 다정스레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 시절엔 그토록 잡기 힘들었던 손이다. 그러나 옛날에 수줍어서 게걸음치던 아내가 이제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잡힌 손에 힘을 주며 나를 쳐다보며 다정스레 웃는다. 틀림없이 그녀도 영도다리에 얽힌 옛날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기념사진을 찍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뒤돌아보는 영도다리는 말이 없고 금혼여행길의 노부부의 마음은 차분히 그 옛날을 더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