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초당(杜甫 草堂)에서

 

 

                                                                                     고임순

지난 5월 5일, 현지 시각 오후 2시 40분. 중국 사천분지의 서쪽 끝자락, 금강을 끼고 있는 고도 성도(成都) 땅을 밟고 나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탁 트인 대륙 끝에 서 있는 기분으로 우러르니 하늘은 금방 비가 내릴 듯이 흐려 있었다.

해발 4백 미터, 1800년 전 삼국지의 무대로 춘추삼국 시절에는 촉한(蜀漢)이, 5대에는 전촉, 후촉이 모두 도읍을 두었던 곳이었다. 작은 거인 등소평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예로부터 오지의 험색(險塞)으로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험난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항공편의 발달로 새로운 관광지와 공업 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명승고적이 많았다. 우리 일행은 먼저 촉한의 재상을 지낸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武候詞)를 찾아 남쪽 교외로 향했다. 그곳을 관람한 다음 동문 밖 금강 언덕에 있는 당대 여류시인 설도(薛濤)를 기념한 망강루와 우물을 돌아보았다. 무려 150여 종에 이른다는 대나무들이 하늘로 뻗은 숲길을 걸으며 죽향에 젖어 꿈꾸듯 두보 초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5월 신록이 싱그러운 완화계(浣花溪) 주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 녹지에 무리지어 뻗은 대나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과연 대숲은 이 고장의 독특한 풍물시였다. 눈이 닿는 곳곳마다에 서 있는 대나무, 그 잎새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마치 시어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언저리는 푸른 비단을 깔아놓은 듯 윤기가 흐르는 초원이었다.

초당 입구에 사람처럼 서 있는 석비 하나. 높이 2미터, 폭 1미터 가량의 흰 돌 바탕에 까맣게 드러난 시 구절이 우리 발목을 잡았다. 시인이 50세 때 이 초당을 노래한 장시 ‘茅屋爲秋風所破歌(모옥이 추풍으로 무너진 바 됨의 노래)’였다. ‘八月秋風怒號’로 시작하여 ‘吾盧獨破受凍死亦足’으로 끝나는 171자 전편을 해행초로 옮겨놓은 역작이었다.

 

‘8월의 가을 하늘은 높은데 바람이 성난 듯이 몰아쳐 우리 집 지붕의 세 겹 이엉을 말았네. 이엉은 날아 강을 건너 물가에 흩어져 떨어졌는데 높은 것은 높은 나뭇가지 끝에 걸렸고, 낮은 것은 굴러 제방의 웅덩이에 빠졌도다.’

 

우리를 인솔한 허세욱 교수의 해석이 흥미로워 모두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두보의 불우 곤궁한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시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비통감이 밀려옴은 어쩔 수 없었다.

평생을 가난과 벗하여 산 두보(杜甫 712~770)는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으로 하남성 공현(鞏縣)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 출신이다. 작년 하·은 유적기행 때 다녀온 두보 생가가 떠올랐다. 길 공사로 어지러운 흙먼지 속 시골길을 물어물어 찾아간 후미진 곳. 어둠이 깔린 필가산(筆架山) 황토 고지 아래 쓸쓸히 엎드린 움집은 ‘杜甫誕生窟’이라는 수려한 행초서체의 현판이 없었던들 누가 눈여겨 보랴. 가난이 평생으로 일관된 파란만장의 그의 삶은 탄생부터 눈물겨웠다.

소년 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그는 강소 하남 산동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35세에 장안으로 갔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44세에 안녹산의 난을 만나 전전하다 48세에 이곳 성도에 정착 초당을 짓고 살기에 이른 것이다. 이곳에서 엄무(嚴武)라는 친구의 도움으로 관직에 오른 그는 240여 수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나지막한 동백나무가 애교 있게 서 있는 초당 마당에 들어서니 마침 노동절 휴일이어서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무려 1300년 전, 두보 부부와 두 아들의 입김이 서린 초막, 잡초 틈새에 이끼 낀 지붕 위에는 이엉 묶음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초라한 방을 기웃거렸다.

牀頭屋漏無乾處 雨脚如麻未斷絶(잠자리마다 지붕이 새니 마른 곳이 없는데 빗발은 삼밭의 삼이 마구 나듯 그치지 않는구나). 입구 석비에 새긴 시 구절처럼 그때의 빈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52세에 이곳을 떠난 두보는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끝내 병을 얻어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의 두보 초당은 그의 사후 송·명·청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13회의 보수공사 작업을 했다 한다. 두 차례의 확장공사로 넓이가 20헥타르가 넘는다고 하니 과연 대륙다웠다. 후손들의 극진한 두보 사랑에 감동하며 경내를 돌아보았다.

두보에 관한 그림과 생전의 업적을 소개한 글이 진열된 대해(大 )  를 둘러보고 두보의 입상(立像)과 역대 석각 및 두보상 탁본이 전시되어 있는 시사당(詩史堂)에서 시인의 참모습을 본다. 깡마른 체구, 눈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간 예리한 눈빛에서 청빈한 성품을 읽었다.

그리고 두보의 전신상, 석각상 및 석각도가 있는 공부사(工部詞)에서도 그렇게 느꼈다. 그 방 양쪽 진열실에는 역대 두시판본 및 15개어로 번역된 두시역서 120여 종이 전시되어 있어 그 방대함에 놀랄 뿐이었다. 그 속에 세종 시대, 우리 한글로 번역된 두시언해(杜詩諺解)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가는 곳마다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명·청·현대에 이르는 유명 서가들의 명필이었다. 하소기, 곽말야, 주덕, 황정건 등의 각기 오체(五體) 대련과 현판들이 내 눈을 사로잡고 이곳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초당박물관에서 『名家書杜詩』의 책자를 사 들고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펴보았다. 두보의 유명한 5언 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를 쓴 정판교와 곽말야의 독특한 필체에 매료되고 말았다.

내가 처음으로 두시를 접한 것은 대학에서 두시언해의 강의를 듣고서였다. 50년대, 누런 종이에 등사된 시를 해석하던 노교수의 강의가 어제처럼 떠올랐다. 풍부한 어휘와 새로운 문체 등 국문학 연구에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한시문학 연구의 바탕이 되었던 두시언해.

그 후 서예 연구를 하면서 더 가까워진 두보 시를 『고문진보』 속에서 찾아 읽으며 서예작품의 명제를 구하기도 했다. 그 동안 두보 시 가운데 가장 애송하고 애서한 작품은 가난한 때의 교우를 노래한 ‘빈교행(貧交行)’이었다.

 

‘   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君子見管飽貧時交 此是今人棄如土’

‘손바닥 앞뒤로 젖힘에 따라 구름이 일고 비가 오듯이

 어지럽고 경박한 오늘날의 친구 사귐을 볼 때에

 그대는 옛날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 생각나지 않은가

 이 도를 지금 사람들은 흙같이 버린다네.’

 

눈과 귀를 터주고 머리를 씻어주던 시 한 편이 지금 내 눈 높이로 내려와 호면에 어린다. 두보의 시정이 녹아들었음인가. 버드나무와 대나무가 농담으로 그림자를 드리운 연못은 사뭇 고즈넉하다. 시성이 노닐기에 알맞은 곳이 아닌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운치 있는 자연 속에 파묻혀 있노라니 시와 자연이 혼연일체된 예술혼이 가슴을 적신다. 더 좀 머물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정자를 내려온 나는 연못가를 따라 돌아섰다. 두보 초당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눈물 먹은 듯한 대숲 길을 천천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