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 강에 몸을 씻고

 

 

                                                                                  장원의

5시에 기상하여 어둠을 헤치고 갠지스 강으로 향했다. 꼭두새벽부터 거리를 메운 인파와 돼지, 소, 염소, 노숙자, 자전거, 릭샤, 자동차 등이 어우러져 시골 장터처럼 북새통을 이루었다. 소똥이나 시궁창을 피하려고 어려서 목자차기 하듯 발을 이리저리 뛰었다. 양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미로를 겨우 빠져나오자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강(강가), 힌두의 성지 갠지스 강가에 내가 섰다. 이승과 저승이 함께 있는 곳, 얼마나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던 곳인가. 가슴이 벅찼다. 동녘 하늘에 붉은 햇살이 비쳐오고, 물안개가 얕게 드리워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장엄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속세의 죄업을 닦느라 목욕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여인들, 꽃과 향을 파는 노인들, 화장용(火葬用) 장작을 실은 배,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는 사두들, 손으로 원을 그리며 기도하는 사람, 시체 태우는 냄새, 구린내, 비위를 상하게 하는 향내…, 어쩜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 연옥이 이렇지 않을까!

나는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욕칠정으로 혼탁된 마음과 같은 흙탕물에 몸을 던졌다. 관객이 아닌 배우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들과 살을 비비며, 그들의 입장에서 눈이 되고 마음이 되어 보고 싶어서였다. 속세에 찌들고 삼독(탐貪,진瞋,치癡)으로 가득 찬 나 같은 범인이 어찌 그들의 심오한 정신세계, 맑은 영혼, 오롯이 응축된 인생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을까만, 좀더 가까이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껴보기 위함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는 세속의 신분이나 빈부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드라 노예계급이나 불가촉천민 태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들의 고단한 삶의 애환을 보고 누가 불행하다고 단언할 것인가. 성직자들처럼 마음을 비워서인지 빨려 들어갈 듯 눈에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 불타는 영혼을. 이런 것들은 내 망막에 깊이 새겨져 오래도록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열망,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내세(來世)가 아닐까?

‘삶이라니요? 삶이라니요?`/`갠지스 강물이 안 마르고 흐르듯`/`영원히 하늘 함께 흐르면 되는 걸`/`아들딸 이어이어 흐르면 되는 걸(서정주의 ‘인도 떠돌이의 노래’ 일부)’이 떠올랐다.

몸을 닦고, 두 손을 모아 태양을 향해 절실히 기도를 올렸다. 숨이 멎을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내가 군중 속에 묻혀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붉은 불덩이가 대지를 차고 솟아올랐다. 강물도 붉게 물들었다. 일행들 모두 화반(花盤)을 들고 배에 올랐다. 배는 화장터와 많은 가트를 스치며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추석날 아침이었다. 뱃전에 술, 안주, 과일, 향불을 피워 차례상을 차렸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향해 순서대로 절을 올렸다. 예식이 끝나자 손에 든 화반을 강물에 띄우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인도 사람들은 몇 달 몇 년씩 걸려 먼 남인도에서부터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목욕을 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한다. 이 성스러운 갠지스 강, 천국의 문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이승에서 지은 죄업을 깨끗이 씻어낸다고 믿는다. 연어 떼가 모천을 향해 모여들듯 멀고 힘든 고행이지만 스스로 이 길을 택한다. 죽음이 있어야 환생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닌 탄생, 죽음은 내세의 출발점이다. 그들은 마치 내세를 위해 살고, 사는 것도 바라나시에서 죽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이곳에서 죽거나 아니면 새로운 사람으로 수미산, 카알라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굴을 파고 들어가 내세에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하다가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타고 남은 재를 강물에 뿌리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장면을 보자 저절로 숙연해졌다. 불꽃 같은 삶일지라도 언젠가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인생, 똑같은 죽음인데 빈부의 차별이 있단 말인가. 부자는 화장을, 가난뱅이는 조장(鳥葬)을 시킨다니 말이다. 화장을 시킬 때는 입을 제일 먼저 태운다고 한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했어야 할 일, 모든 화(禍)의 근원이 되는 입을 봉하는 의미가 아닐까?

 

마니아만이 할 수 있다는 인도여행을 다녀와서 눈으로 본 것이 있다면 거지, 소똥, 노숙자, 무질서, 불결, 먼지일 것이요, 마음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행복과 불행, 천당과 지옥 등일 것이다. 삶을 생각하거든 공동묘지를 돌아보라고 했다. 삶의 끝이 죽음의 시작이거늘 삶과 죽음은 한 고리에 연결된 불가분의 관계이다.

버스 차창을 향해 갓난아이의 배와 입을 가리키며 손을 벌리던 초췌한 엄마의 모습, 그윽하고 초롱초롱한 꼬마들의 눈망울을 피해 눈물을 닦던 내 모습이 잠결에도 어른거린다. 또 사람마다 더럽다고 고개를 돌리는 갠지스 강 흙탕물 속에서 나를 맞아주던 마음의 빚과 살가운 사람 냄새를 못 잊어 눈을 감기가 두려운 것은 왜일까. 결국 여행에서 돌아와 ‘두 번 다시 가보지 못할 곳’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곳이 잊혀지지 않아 몸이 아파버렸다’는 사람도 있다. ‘하나만 아는 것은 전부를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종교학자 막스 밀러가 말했던가.

 

 

장안과의원 원장. <에세이 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빈자리엔 정뿐이랴』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