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단상(五十斷想)

 

 

                                                                                    김건식

금년 1월로 만 50세의 선을 넘었다. 공자 말씀으로는 知天命의 나이가 된 것이다. 天命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옆의 선배가 픽 웃으며 죽을 날이 멀지 않음을 아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농담치고는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린다. 50을 바라보면서부터 부쩍 자신이 남은 삶 동안 해낼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실감하곤 했는데 어쩌면 이것도 지천명의 시기로 접어드는 조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늘 부모상 소식이 주류를 이루던 동창회 통지문에도 언젠가부터 자식 혼사가 슬며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주로 상가에서 술잔을 나누곤 했는데 앞으론 이런 자리에서 더 자주 만나겠구나.”

얼마 전 서로 아들딸을 주고받아 사돈이 되는 경사를 치른 고교동창의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들끼리 나눈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대학 문턱도 넘지 못한 처지라 식장 앞에서 하객을 맞는 친구의 심사는 헤아릴 수 없지만, 나도 언젠가 저 어색한 자리에 서면 지천명의 의미가 더 절절하게 다가올 것 같기도 하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덕에 정년 65세까지 버틸 수 있기 때문인지 아무리 주위에서 ‘사오정’이니 뭐니 해도 아직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솔직히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전에는 아득히 멀게만 여겨지던 정년도 이젠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교단에 선 지 어느덧 20년에 이르고 보니 남은 14년 반이 얼마나 속절없이 지나갈 수 있는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손가락을 꼽으며 나는 언제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나 답답해 했던 기억이 있다. 컴퓨터는커녕 TV도 없던 시절, 그저 동네 아이들하고 다방구나 하며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웬일인지 동무들도 골목에서 자취를 감춘 날에는 하염없이 땅바닥의 개미나 지켜보며 시간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름날 오후는 어찌나 길었던지.

자라면서 주위 어른들로부터 세월이 덧없이 지나간다는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내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다. 학교 가는 것이 지겹기만 했던 학생 시절에는 시간이 토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지나갔던 것 같다. 어설픈 나이에 대학 강단에 서면서부터는 방학까지 한 학기 단위로 흘러가던 세월이 이제는 갈수록 가속이 붙는 것 같다.

“정년 퇴직까지의 10년은 마치 크리스마스와 정초 사이의 한 주일만큼이나 어이없이 지나간다.”

어느 퇴직한 선배 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10년이 그리 허망한 것이라면 14년 반인들 그보다 크게 나을 게 없을 것이다.

학생 시절 배웠던 한시 중에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이란 구절로 시작하는 朱憙의 시가 있다. 제자인 중국인 유학생에게 原音을 달아달라고 부탁하니 그 학생 말이 중국에서는 ‘少年易學老難成(소년은 쉽게 공부할 수 있지만 늙은이는 이루기 어렵다)’이라고 한단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어려서 들었던 쪽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 시의 다음 구절인 ‘一寸光陰不可輕(한조각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이란 구절도 유명하지만, 요즘의 내게 더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마지막 구절인 ‘階前梧葉已秋聲(섬돌 앞 오동잎은 이미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이다.

며칠 전 모처럼 저녁 식탁에서 대입 준비에 찌든 두 아들을 앉혀놓고 자못 진지한 어조로 이 시를 읊어준 일이 있다. 중국 학생이 알려준 異說도 섞어가면서 말이다. 사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뜸 큰놈이 볼멘소리로 밥 좀 편하게 먹잔다.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으며 짐짓 화제를 바꾸고 말았다.

50줄에 들어선 애비의 애처로운 감상도 종내 불순한 설교로 받아들이고 마는 아들의 모습에서 과거 철없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놈들까지 철이 들게 되는 날에는 세월의 빠름을 한층 더 실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워싱턴주립대 법학박사.

미국 하버드법대, 일본 동경대 법학부 객원교수. 서울대 법대 교수.

저서 『증권거래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