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좋은 날

 

 

                                                                                        김유진

우산을 접고 버스에 오른다. 카드를 요금단말기에 대자 삑,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아한 걸음으로 뒤쪽의 빈자리로 향한다. 버스가 출발한다. 그때다. 아앗! 중심을 잃은 나는 어찌 해볼 도리 없이 버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문학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내 앞에서 언제나 늑장을 부리던 파란 신호등과 버스가 모처럼 바지런을 떨었고 넉넉하지 못했던 비까지 사뿐히 내려준 아침이었다. 짜릿한 예감에 콧노래까지 흥흥거렸는데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무릎이 쓰리고 발목이 삐끗한 것보다는 차마 웃지도 못하는 버스 승객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 통에 얼굴만 화끈거렸다. 나도 이 장면의 주인공이 아닌 관객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이를 먹어서인지 요즘 들어 자주 넘어진다던 주위 분의 말을 듣고 걱정을 하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남을 이해하는 데는 체험 이상 좋은 게 없다는 인생의 교훈이었을까. 사람들이 접어놓은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로 흠씬 젖어 있는 버스 바닥은 고무판화에 검은 잉크를 발라 찍어놓은 것처럼 신발 밑창의 무늬들이 새겨 있었다. 내 엉덩이도 할리우드 스타의 손도장마냥 예쁘게 찍혔을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나 빈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주머니나 가방을 뒤져도 휴지 한 장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손수건이랴. 망신살이 뻗친 날이다. 분위기 있는 여름비가 아니라 질척거리는 청승이고, 때맞춰 달려와 준 버스도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술수였다. 운수 사나운 날의 전주곡이 분명하다. 머리 위에서 불운의 마녀가 망토를 펄럭이는 것 같다. 바지에 손을 쓱쓱 문지르며 모임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종일 꼼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이런 날은 몸을 사리는 게 최고다.

“오늘 좋은 일 있으려나 보네. 주목받는 거잖아요. 복권이라도 사 봐요.”

강의실에 도착해서 그 새 마른 옷의 흙먼지를 털며 툴툴거리는 내게 회원 한 분이 편안한 웃음으로 말했다. 엉?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윙하는 공음이 들린다. 복권은 돼지꿈 꿔야 사는 거 아니었나? 액땜한 거라고 나름대로 한껏 다독이고 있던 나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해몽에 눈을 꺼먹꺼먹 하면서도 마음의 창이 환하게 열렸다. 꺼림칙하고 찜찜하던 돌덩어리가 순간에 녹고 있었다.

친구에게서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는 걱정을 들은 일이 있다. 잘은 몰라도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까지 맞장구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엄청 신나는 일이 있을 모양이라고 얼른 둘러댔다. 친구는 엉뚱하게도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는데 며칠이 지나서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그 해몽이 맞았나봐. 우리 신랑 승진했어.”

‘되돌려 긍정하라.’

이 말은 몇 년 전부터 내가 수첩 맨 앞장에 써놓는 글이다. 수첩을 펼 때마다 항상 마음에 새기려 노력한다. 살다 보면 늘 웃을 일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좋은 일도 감사하고 그렇지 않은 일도 거꾸로 돌려서 마음을 가볍게 하려는 의도였다. 복권이라도 사 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슬핏 웃음이 터졌다.

신이 노해서 세상에 돌비를 내릴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바위에도 끄떡없을 튼튼한 돌집을 짓고 숨어 살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비는 내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지진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돌집에 깔려 죽고 말았다.

복권을 사진 않았지만 나는 영화를 한편 보고 모처럼 시내 대형 서점에 나가 수많은 책 속에 파묻혀 여유롭게 몇 시간을 보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 차를 마시고 근사한 저녁까지 얻어먹었으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멋진 날이었다. 만약 처음 생각대로 움츠린 채 집에서 꼼짝 안 했다면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불쾌한 마음에 두통이나 소화불량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 앉아 마음을 지긋이 눌러본다. 무심히 내 자신과 무언無言을 나누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번쩍 떠보니 누가 던져놓기라도 한 듯 불단에 올려 있던 노란 참외 하나가 떨어져 바닥에 누워 있다. 이건 무슨 뜻인가. 가만히 다가가 참외를 들어보니 배가 쩍 벌어져 있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고 참외 하나를 꺼내 씻는다. 과도를 들고 껍질을 깎아 사각사각 다 먹었다. 그러고 나서 빙긋이 새어나오는 웃음. 원효의 한 마디를 들먹이진 않으련다. 비가 내렸으니 녹음이 짙어지겠다.

 

 

<에세이문학>으로 등단(2000년).

도서출판 푸른향기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