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것

 

                                                                                김태길

우리집 사모님이 오래 전부터 즐겨 보시는 TV 프로 가운데 ‘아침마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즐겨 보시는 것은, 그것이 여성을 위한 프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 프로의 진행을 맡은 젊은 여자가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얼굴은 예쁘나 몸이 좀 뚱뚱하다는 것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런데 그 옥의 티를 없애는 데 그 여인이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결과였습니다. 우리집 사모님도 체중을 많이 줄여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 피나는 노력의 비결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저 남의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는 미덕만을 보였습니다.

그날도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아내는 TV 채널을 ‘아침마당’으로 고정시켰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을 까닭이 별로 없었지만, 부랴부랴 일어서는 것이 좀 미안한 듯하기에, 잠시 더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화면에 전개되는 화제는 숙녀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주저물러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마당’에 출연한 사람들은, 진행자 두 사람을 제외하고 6~7명 정도였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연예인들이었고, 대학교수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날의 화제는 요즈음 젊은 여성들의 사고방식 내지 생활태도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젊은 여성들이 ‘나’를 위해서 ‘여성’으로 살다가, 나이가 들면 아기를 낳고 ‘모성’으로 사는 것을 당연시하였으나, 근래는 ‘모성’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여성’으로서의 ‘나’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좌중에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도대체 ‘나’가 무엇이며 ‘나’를 사랑하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우선 ‘나’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범위 안에 드는 것으로서 우선 떠오르는 것은 나의 몸입니다. 나의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다리는 분명 나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몸만이 나의 전부는 아닙니다. 나의 글이 호평을 받으면 내가 기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내 기분이 어둡다는 사실은 나의 글도 나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가 잘되면 부모의 마음도 매우 흡족하다는 사실은 자녀도 부모의 ‘나’ 즉 자아自我 안에 포함됨을 의미합니다.

국제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이기면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순간의 그들에게는 대한민국 전체가 그들의 ‘나’ 즉 자아 속으로 흡수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 즉 자아라는 것은 물질의 체계가 아니라 의식(意識)의 체계라고 주장한 윌리엄 제임스(W. James)의 학설에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도 자아라고 보아야 문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의 몸만이 나의 실체(實體)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삶은 조만간 벽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몸관리를 잘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 몸의 젊음을 한동안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70세가 넘고 80세가 넘은 뒤에까지 몸의 젊음을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나이가 들면 조만간 ‘아줌마’가 되고 또 ‘할머니’가 되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나의 인격과 나의 정신을 기르는 방향으로, 또는 자녀를 기르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방향에서, 즉 ‘우리’ 속으로 기꺼이 합류함으로써, 자아의 길고 큰 삶을 모색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은 자손을 계속적으로 생산함으로써 한 세대世代만으로는 짧기 그지없는 우리의 삶을 길게길게 연장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 그 믿음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다만 생명의 세대적 계승(繼承)이 남성의 계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그릇된 생물학을, 즉 여성은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고 기르는 밭에 불과하며 생명의 씨는 오직 남성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다고 본 그릇된 생물학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못내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그들이 인식한 진리 또는 터득한 지혜를 젊은 세대에게 전수함으로써 생명을 끝없이 연장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 그 믿음을 실천에 옮기고자 시도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도 웃지 못 할 잘못이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진리 또는 지혜를 전수받을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남성의 젊은 세대에게만 있다고 착각한 잘못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남성과 여성의 연애보다도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를 훨씬 값진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평가한 나머지, 플라톤은 자신이 세운 아카데미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을 남성 젊은이들에게만 국한했고, 플라톤의 가르침을 열망한 젊은 여성들은 남성으로 변장하고 그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시는 바와 같이, 삼라만상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게 마련입니다. 인간도 그 섭리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저 섭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삶을 설계하고, 하나밖에 없는 생애를 값진 작품으로 형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大我)의 길이 정도(正道)라고 보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