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사람을 용서하기로 한 까닭

 

                                                                                        김흥숙

이제 아무도 나를, 낮 뒤에 오는 밤을 인정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는커녕 나의 존재마저 잊어간다. 겨우 몇십 년 전만 해도 칠흑처럼 검고 아름답던 내 얼굴이 이젠 무수한 네온으로 인해 싸구려 분칠을 한 나이든 매춘부 같다. 어찌 보면 인간 문명의 역사는 내 권위와 존재를 지우려는 노력이었다. 내 몸을 이루는 어둠은 인간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무지의 대상이었던 만큼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친 낮이 서쪽 섬들 위로 내려 앉고 나면 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들의 휴식을 위해 빛과 열기로 씨근거리는 지구 위에 검은 망토를 덮었다. 존 밀턴의 하느님에게 인간이 가장 사랑스러운 피조물이었던 것처럼 내게도 인간은 언제나 첫째였다. 나는 오직 순정한 어둠을 인간에게 선물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선물한 어둠은 인간의 잠을 도왔고 그들은 잠 속에서 꿈꿀 수 있었다. 꿈,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의 사랑은 배반당하기 시작했다. 뱀이 나서서 인간을 선동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백열전구와 축음기를 발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그 반역의 선봉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개발한 전구들이 내 몸을 갉아 내기 시작한지 백이십 여 년, 이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엉망이 된 것은 내 몸만이 아니다. 저녁밥을 먹기 무섭게 잠들던 사람들이 불면의 포로가 되어 꿈을 꿀 수 없게 된 것 같아 안쓰럽다. 자정이 되어가는 시각, 이불 위에 내 망토를 덮고 누워 지나간 일과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젠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생각에 꼬리를 다는 일은 바늘귀를 꿰는 일과 달라 어두울수록 잘 되지만, 이젠 자정 즈음조차 어둡지 않다.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 어느 시각에도 단 3분 간의 고요한 어둠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인공 빛으로 인한 피로를 가중시키는 소음이라니. 기껏해야 가로수 노릇을 하는 나무들의 도란거림만이 들리던 거리에 잠들지 않는, 혹은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밟는 액셀러레이터 소리가 시끄럽다.

달이 한숨 섞어 보내는 빛으로 어슴푸레 아름답던 길에 자동차의 하이빔이 헨켈 나이프처럼 번득이며 어둠을 조각낸다.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살기가 힘들어졌고 그래서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거라고 변명을 하는 이들이 있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고통을 잊기 위해 병동의 복도를 서성이는 환자처럼 무거운 몸을 끌며 사람들의 세상을 기웃거린다.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로 인해 대부분의 창문들이 열려 있다. 느릿느릿 걷다 보니 어느 창문 턱에 솜털 고운 미백 복숭아 두 개가 놓여 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 한 쌍과 그들의 아들인 듯한 젊은이 하나가 캠핑 온 사람들처럼 거실 바닥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자고 있다. 놀랍게도 꿈까지 꾸면서! 머리가 많이 희어진 남자는 회사원인지 꿈 속에서조차 말을 잘 듣지 않는 부하 직원들 때문에 바쁘다. “또 이렇게 했어?” 호통을 치지만 화난 목소리는 아니다. 대기업 귀족 노조원들 월급의 삼 분의 일을 받으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못하는, 나면서부터 선택권 없는 삶을 살아온 부하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서려 있다.

그의 옆에는 남편만큼 많은 흰머리를 염색하여 가린 여자가 몸을 굴리며 여러 번 꾸어본 듯한 꿈을 꾼다. 써 놓은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틀이 잡히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이 여자의 머리 속을 휘젓는다. 한참 그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난 여자가 남편의 아침 식단을 걱정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남편이 자꾸 담배를 피운다고 걱정하다가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좋다는 말을 듣고 사다 둔 복숭아를 생각하며 살짝 안도한다. 마침내 서늘해진 새벽 4시의 공기가 남편의 벗은 어깨 위에 내려 앉는다. 여자가 차렵 한 장을 덮어준다.

스물 중반 아들은 꿈 속에서조차 힘겹다. 꿈 속의 그는 아직도 강원도 전방에서 2년 여의 징집된 삶을 살고 있다. 영하 30도 뼛속까지 추운 아침 고참들의 워커를 데우던 시간이 리플레이 된다. 다행히 어느 순간 자신이 두 달 전 그 삶을 끝냈음을 기억해 낸다. 잠시 후 이어지는 꿈에서 그는 돈이 없어 괴롭다. 분명 지폐를 꽉 채워넣었는데 열어보면 신문지 조각뿐인 지갑. 누군가의 말처럼 꿈은 현실의 반영인가, 그는 잠시 실소하고 잠으로 복귀한다. 서울로, 아니 시민의 삶으로 돌아올 때 가졌던 희망은 7월의 녹음 같지만 이제 그는 그 희망을 현실화하는데 드는 비용이 얼마나 큰지 안다. 넥타이로 무장하고 새벽길 나서는 흰머리 아버지, 번역거리와 씨름하는 갱년 중인 어머니. “반드시 성공해서 은혜를 갚을게요.” 부모 앞에서는 차마 떨어지지 않던 입이 꿈 속에선 꽃 같은 단어 몇 개를 흘린다.

세 식구의 머리맡 시계가 4시 30분을 가리킨다. 멀리 아침 해가 부스럭대며 낮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좁은 거실에 누운 세 사람이 꿈 속에서조차 서로를 염려하며 사랑하고 있다. 내 몸에 상처가 나고 내 예민한 귀가 좀 괴로운들 어떤가.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꿈을 꾸는데. 에디슨도 저렇게 꿈꾸었던 건지 모른다. 세상 사람이 다 저를 조롱할 때 저를 믿어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전구와 축음기를 만들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문명은 나를 지우기 위한 노력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다. 밀턴의 하느님이 인간을 용서하듯 나 또한 에디슨을, 어둔 길 액셀러레이터 밟는 발들을 용서하기로 한다. 저녁 나절 지친 낮을 부축할 때에는 내 몸과 마음이 훨씬 가벼우리라. 무릇 용서란 하는 자의 짐을 더는 일이니.

 

 

<코리아 타임스> 기자 역임.

수필집 『시선視線』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