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언저리에 가을이

 

                                                                                   宣廷垠

첫번 쉼터에서 책 한 권에 물병 하나가 전부인 배낭 속으로 비닐에 쌓인 신발이 들어가고, 오랜 습관대로 맨발이 된다.

큰비 다음 날의 산행.

등산로 옆 개울에 모처럼 살진 물결이 넘실대고 물소리도 경쾌하다.

개울을 가로질러야 하는 돌다리에 이른다. 두 계곡의 물이 만나는 드넓은 곳, 돌들을 성기게 쌓아놓아 물도 흘러가고 사람도 건너갈 수 있도록 돼 있는 곳인데, 물이 넘치고 있다. 등산객들이 건너기 어렵게 넘친다.

한 여인이 물 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여자는 물 속에서 돌을 건져올려 돌다리에 갖다놓는다. 천사표 아줌마로군. 나도 물 속으로 들어갔다. 생면부지의 아주머니와 작업상의 협의까지 하며 유쾌한 울력을 했다.

돌다리가 한결 높아지고 탄탄해졌다 싶을 때 손을 뗐다. 아주머니는 뭔가 미진하다고 여기는지 아직도 잔손질. 배낭을 메며 보니 반바지는 거의 다 젖었고 물 속을 더듬느라 상의도 젖었다. 대충 손으로 쥐어짜고 걷는다.

돌다리를 지나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한 여자 등산객이 말을 걸어왔다.

“아까 그분하고 내외분 아니셨어요?”

뭔가 의논까지 해가며 울력을 하는 두 사람을 부부로 오인했다.

“아주머니가 좋은 일을 하고 계셔서 제가 조금 거든 거지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정연한 얼굴. 미인이다. 예쁘거나 섹시한 게 아닌 기품 있는 미인. 가슴이 뛰는 걸 느꼈는데 어찌 된 셈인지 발걸음은 더 빨라져 성큼성큼 여자를 앞서 나갔다. 미인과 얘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렇듯 어이없이 놔버리자 산행을 하면서도 미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미모 따위에 관심 없는 대범한 남자 행세를 한 셈인데… 도대체 왜 그런 바보짓을. 스스로에게 불평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뒤 맥주를 한 잔 하며 아내에게 산행 얘기를 했다.

“돌다리를 놓던 그 착한 아주머니는 필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어느 보살의 현신이었을 거 같아.”

교회 다니는 아내는 비유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나는 모르는 척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 미인은 아마도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 나타난 또 다른 보살이었을 거고.”

아내는 객쩍은 소리 그만 하라는 듯 아직 반도 더 남아 있는 잔에 맥주를 부어준다.

미인 보살은 내 마음의 위선과 갈등을 꿰뚫어보고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좋은 보살을 만났다고 우화 같은 생각을 하자 연상인지 비약인지 ‘만사는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유난한 실감으로 다가왔다.

특별할 것도 없고 꽤 빛이 바랜 이 아포리즘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생활태도가 긴장되거나 노한 마음보다 엔도르핀을 듬뿍 만들어낸다는 말은 타당성을 갖고 있소. 마음가짐이 지적능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그러 하고. 문제는 그런 걸 지식으로 머리 속에 넣고만 있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거요. 실제 생활에서 써먹어야지, 오늘처럼.’

그러더니 천기라도 누설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덧붙였다.

‘하물며 신(神)께서도 긍정적인 사람 편이라니까.’

고백하건데 사실 나는 지금까지 그다지 낙천적인 편이지 못했다.

그것은 항상 늦게 깨닫는 나를 위해 그 말을 해주려고 별안간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생로병사가 모두, 아니 이 세상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세계관이 있다. 그런 종교적 깨달음까지 가지 않더라도 기쁨보다 언짢음, 신명나는 일보다 실망스런 일이 더 많은 게 우리 삶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짧고 끝은 알 수 없어 찌푸리고 살기엔 너무나 소중하다.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간다.

저만큼 숲 언저리에 가을이 시계를 보며 서 있다.

 

 

<계간수필>로 등단(2004년).

전 KBS  국장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