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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

 

                                                                                     한원준

무지개가 있습니다. 아니, 없어도 좋습니다. 무지개란 이름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만들어지도록 즐거워집니다.

무지개는 그저 무늬입니다. 가지고 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우리의 이야기를 실어 날릴 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는 스스로처럼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실린 책에서는 그렇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희망과 무지개는 어딘지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무지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안타까운 소망, 절대 가질 수 없는 쾌락이 됩니다.

무지개. 무지개는 빛의 반사작용이며 산란작용일 뿐입니다. 그래요, 저기 해가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쏟아지는 비나 부서진 물방울로 스크린이 처져 있습니다. 물방울로 뛰어든 빛은 공기와 밀도가 다른 물방울에 꺾이고, 다시 꺾이고 꺾여 거꾸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기 서서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까지 뛰어듭니다. 산란되어 일곱 혹은 다섯 가지 색으로 나뉘어진 햇빛.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반원 모양의 다리. 무지개.

내가 일곱 살이었던가? 유월 어느 날, 장마가 오기 바로 전,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던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무지개다, 봐라.”

오후. 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간신히 그친 하늘에, 구름 사이로 해가 빛났습니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 무지개가 떴습니다. 아름다운 일곱 색의 높은 다리.

이상하게도 내가 처음 본 무지개를 생각하면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처럼 선명한 색의 줄들을 떠올립니다.

실제로 무지개 빛은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어 보아도 5색인지 7색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7색은 좀 과장된 구분처럼 느껴집니다. 제겐 간신히 다섯 가지 색입니다.

쌍무지개도 있습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찍어 놓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가 있습니다. 무지개 이야기가 나오면, 난 묻어둘 수 없어서 말해야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밤무지개. 내 슬픈 전설 같은 밤무지개.

사람들은 무지개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무지개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요. 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

내가 어렸을 때, 어느 여름에 시골이라 불리던 곳에 갔습니다. 친척이나 사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갔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저, 계획이 망가진 내가 짜증을 낼 만큼 비가 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비가 그쳤습니다. 난 툇마루에 앉아 창호지를 스며 나오는 안방 불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마당 나무 그림자를 향해 볼이 부어 입을 삐죽이고 있었습니다.

젖은 풀 속에서 벌레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벌레들이 비에 홀딱 젖었는지 궁금해 툇마루에서 내려섰습니다. 그러자 뚝, 벌레 소리가 그쳤습니다. 그러나 저 앞에서 아직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걸음을 가까이 하자 다시 벌레 소리가 그쳤습니다. 난 좀더 멀리 벌레 소리를 찾아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멈춰 쪼그려 앉았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내 움직임에 숨을 죽였던 벌레들이 조심스레 다시 울음을 시작했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울고 있는 벌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쪼그려 앉은 다리가 불편해 일어서자, 벌레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갑작스런 고요에 놀라 혼자 피식 웃다가, 낯선 하늘의 기운을 보았습니다. 밤 안개인가? 은하수인가? 뒤쪽 산을 배경으로 한쪽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져 내린 흰 반원. 지워진 듯 이어진 듯 희미한 한 줄기 선을 보다가 난 몸을 돌렸습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난 다시 몸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 반원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습니다. 난 고개를 갸웃하며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천천히, 희미한 반원이 다시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쉽게 내가 본 흰 반원을 마음 속에 접어두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중고 서점에서 구했던 낡은 책 속에서 ‘밤무지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처럼, 밝은 세상이 무서워 이끼처럼 죄악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나타나는 밤무지개. 귀신과 구미호와 도깨비 같은 어둠의 존재들에게 조물주가 남겨준 관대함의 표시.

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

어두운 밤에만 숨어 나타나서 밤무지개, 너무 창백하고 희미해, 달빛에 의지하지 않고는 보이지도 않아 달 무지개였습니다.

내가 보았던 그것이 바로 밤무지개였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 공부를 하러 가서, 그곳 도서실에서 하와이를 설명한 책자를 꺼내들었습니다. 그 책에서 다시 밤무지개를 만났습니다.

반사되는 빛이 사람의 눈으로도 보일 수 있을 정도의 광원, 즉 보름달이 있어야 하고, 그 반대쪽에는 빛을 반사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물방울, 즉 비가 와야 하고, 그 빛이 먼지에 부딪혀 흩어지지 않을 만큼 공기가 맑아야 밤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그 책은 지구 위에서 밤무지개를 볼 수 있는 곳은 하와이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밤무지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맑은 하와이의 자연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며 끝을 맺었습니다.

난 책을 덮고 일어나,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밤무지개를 생각했습니다.

인적 없는 깊은 산 속에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높은 하늘과 별과 울창한 숲뿐이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기슭까지 찾아와 걸음을 멈추고 진흙을 이겨 집을 짓고, 땅을 갈아 곡식을 기르고, 불을 구워 먹으며 모여 살았습니다. 소녀는 사람들의 마을까지 내려와 훔쳐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 순박하고 잘 생긴 청년을 눈에 새겨두었습니다. 네. 사랑이었습니다. 숲 속 어느 꽃보다 아름답고, 밤하늘 어느 별보다 곱게 반짝였던 소녀는, 그러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아홉 꼬리와 무너진 가슴뿐인 소녀는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빌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 구미호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소녀를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다리를 내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는 해가 밝게 빛나는 낮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을 살아가는 것들에겐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서글픈 밤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

물론 내 말을 허풍이라 손가락질하겠죠? 그거 알아요? 나만이 아는 비밀. 크게 맘먹고 알려주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고 되레 나를 조롱하는 그런 것.

처음에 난 무지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비밀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비웃음만 사서 이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축축한 밤공기 때문인가요? 갑자기 내가 가진 비밀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밤무지개 혹은 달 무지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계간 수필>로 등단.

저서 『감골에서 온 편지』, 『불임의 땅』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