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에 구름무늬가

 

                                                                                 이고운

초례청에서 맞절한 덕이가 이쁜 복이의 귀밑머리를 풀고 있다. 복이는 연지 고운 볼에 속눈썹 숙이는데, 덕이가 손짓을 한다. 찰나에 바람은 방안에 일어 촛불을 머금고 휘돌아 사라진다. 아늑한 어둠, 태초의 정밀(靜謐) 안에 오색의 향기가 서리면서 귀에 감도는 은은한 소리는 한없이 울려 새아씨의 꿈은 밤새도록 반짝인다. 화촉에 닿았던 숨결이 한 천 년 맴돌아 종이 되었다.

너에게 닿기를 소원하며 무거운 육신을 다비하여 종은 끝없이 깃으로 환생한다. 구름이 되어 천둥이 되어 비가 되어, 밤길 가는 아이의 등불에 심지가 되어 고요를 깨워 고요를 창조한다. 촛불이 녹아드는 묵언, 그것은 태초에 있었던 원의 기호이다.

바람이 분다. 푸른 이마가 산산이 부서지며 수많은 원반이 날아간다. 떠나지 않고는 돌아오지 못하는 홀씨들이 막막하고 두려운 순례를 가고 있다. 사바의 티끌을 사루어 연꽃에 피고 호수에 이슬로 내리어 나무랑 속살 만지며 빙글빙글 웃는다. 오늘도 하루, 숲을 탑돌이 하다가 당신을 찾아가는 길, 산이 회오리로 솟는다.

천 년의 먼동을 흐느끼며 인연을 끊어내는 그 절절한 기원으로 이슬 터는 새벽, 저 멀리 아물거리는 들창으로 실안개가 흘러간다. 시든 꽃은 땅에 내리고 나비가 할랑할랑 접었다 폈다, 흰구름 홀로 무상을 잣고 있다. 칠월의 종각 위에 아청빛 하늘이 깊다.

소리는 잠자지 않는다. 청동의 블랙홀로 회귀한다. 우주의 고독을 부르는 소명을 띠고 하늘을 목놓고, 고통은 그리움에로 돌아온다.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물결 능선을 그리며 엄마의 마을로 내려 다시 종이 된다. 실체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들이 실체로 점지받는 소리무늬, 바람은 가슴에 가슴에 씨가 되는 무늬이다.

맨 처음 만든 이, 그는 어찌하여 사람의 가슴을 가져다 종을 떴을까? 둥근 몸이 되기까지는 고뇌에 찬 밤을 숱하게 새웠을 것이다. 탐욕과 애욕의 살점도 질투도 송두리째 던져넣고, 원망이 된 연애편지들과 비밀한 일기장도 집어넣고, 용광로는 쉼없이 끓었을 것이다. 허송세월 버티느라 수고한 뼈마디마저 자근자근 분질러서, 불을 달구었을 것이다. 무색 무취의 영혼이 될 때까지 영겁의 세월을 기다리고야 구름무늬가 피는 둥근 가슴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종은 소리가 사는 집이 되었으리라.

타박타박, 산자락을 혼자 내려오다 길가 바위에 앉아 먼 산머리를 보았다. 참 연한 하늘 어스름으로 종소리가 지나간다. 산사의 저녁 종소리는 숙연하다. 허허하다 못해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솔개바람 너울이 일었다. 소슬한 나뭇잎이 추루루 흐르는 골짜기, 산새 소리마저 합장하는 계곡의 발목을 적신다. 어느 작은 간이역에 서성거리는 초라한 넋들, 더러는 녹슬지 않는 풀빛 언어이련만, 억새의 빈 대궁이 허연 번뇌를 궁시렁거린다.

오장을 안고 사는 역려(逆旅)의 나그네, 나는 언제 소리가 와서 머무는 종이 되려는가. 소리만 보듬고도 우그러지지 않는 둥근 가슴이 되려는가. 땅에 가깝되 하늘에 멀지 않고 하늘에서 멀되 가까이 달려서, 끊어졌는가 하면 다시 이어지는 맥놀이……. 저 구름으로 피어나는 소리 꽃이.

 

 

<계간수필>, <월간문학>으로 등단.

대표에세이회. 계수회 회원. 개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