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수필의 맛과 멋

 

                                                                                     김형진

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진실성 획득에서 발현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진실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

문학이 인생의 기록임을 감안할 때 작가가 처한 환경과 생활, 그 안에서 취하는 작가의 태도 등이 문학의 바탕임은 물론이다. 우선 자기 앞에 던져진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여 어떤 패턴을 유지하는가에 따라 진실성의 획득 유무가 결정된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주어진 현안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과정 없이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는 대상을 주시하는 투철한 안목과 자아를 응시하는 냉철한 의식이 필수적이다. 자칫 관찰이나 분석의 결과만을 피상적으로 기술한다면 이는 문학이 될 수 없다. 문학에서 추구하는 진실은 대상에서가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목일은 형체도 없는 ‘마음’이라는 사슬에 묶여 번민한다.

이 글은 ‘어디 있는지 모르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마음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런 의문은 지적 공백을 채우기 위한 갈증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자아의 내면을 향해 던지는 자문(自問)이다. ‘보이지 않으면서 삶의 한가운데 자리잡아’, ‘수시로 변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의 한판 승부를 자청하고 있다. ‘매일 수염을 깎듯이 마음도 매일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루소의 충고를 기억해 내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라’는 월하月下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도 한다. 인도의 명상가 스와니의 ‘마음은 없다’에서 얻은 ‘진아(眞我), 깨달음(self-realisation)이 일어날 때는 마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를 생각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언들로도 마음의 사슬에서 탈출할 수는 없다. 사슬이 더욱 죄어들어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알 수 없는 게 마음임을 느낀다.’ 그러나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게 ‘마음’이다.

 

‘마음’을 일시적인 구속이나 관념이나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편견에 불과하지 않을까. 마음은 소유 혹은 무소유의 관념이나 대상이 아닐 듯하다. 개체가 지닌 우주이며 영원한 통로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호흡처럼 실존하는 상태가 아닐까.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의문형 어미로 자답(自答)하고 있다. 사슬 탈출의 시도는 부질없는 헛수고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마음과 벗하며 살 수밖에 없다.’

정목일이 ‘마음’에서 보여준 진지성과 치열성은 수필의 맛을 살리는 근본이다. 좀더 숙성시켜 유연한 표현을 이끌어내었더라면 맛에 깊이를 더하는 멋까지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연희의 ‘가을이 저물어 갈 때’의 문장과 김수봉의 ‘지룡아, 너 어디 가니’의 구성은 주목할 만하다. 문장은 언어구사력의 산물이요, 구성은 요소들의 조합으로 최상의 감동을 생성하기 위한 논리적 사고력의 산물이다.

‘가을이 저물어 갈 때’는 가을 비, 낙엽, 달밤, 벌레의 울음소리 그리고 이별 등을 연결시켜 전편에 애잔한 정조가 흐르고 있다. 이러한 정조를 표출하기 위하여 촉각을 곤두세워 여러 가지 비유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비유는 적절하고 산뜻하다. 그러나 어찌 보면 현란하기까지 한 표현기교가 수필의 맛을 획득하는 데 적합한 것일까?

 

‘달빛이 투명한 낯빛으로 푸르던 밤. 밤만이 내 가슴께에 얹힌 두꺼운 모포를 벗겨주는 손길이었다.’

‘눈앞의 풍경 속으로 바람이 스치고 갈 때마다 내 가슴 위로도 마른 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요즈음은 어깨가 뻐근하다. 뼛속 어디쯤에 골병이 들어앉아 영역 싸움을 하는지 여기저기서 뭐라고 소리지르는 것들이 있다.’

 

등의 문장은 멋진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으나 수필의 문장이 취해야 할 담백한 맛을 삭감시켰다. 수필의 맛과 멋은 숙성된 사유의 결과를 일상적인 소재와 연결시킨 평이하고 명징한 문장 안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기억할 일이다.

 

김수봉의 ‘지룡아, 너 어디 가니’는 작중 진행 시간이 짧고 공간 또한 좁지만 의식 속의 시간은 길고 공간은 넓게 사용하는 입체적 구성법을 활용하고 있다. 기어가는 지렁이 묘사로 시작하여 지렁이에 대한 여러 가지 유익함을 강조하기 위해 설명과 설화와 회상을 동원한다. 결미에서는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본 지렁이를 다시 떠올려 그의 안위를 걱정한다.

내면의 진실을 표출하기 위해 활용되는 입체적 구성에 서두, 본문, 결미가 안정적인 이 ‘지룡아, 너 어디 가니’가 맛보다는 멋에 치우친 감을 줌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우선 단편적인 정보 전달을 들 수 있다. ‘흙을 먹고 흙 속의 유기물질을 분해하여 분변토를 배설하는 지렁이’, ‘지렁이의 유익함을 잘 아는 사람들은 토룡이라 부르기도 하고’, ‘요즈음은 가축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한문 이름 지룡(地龍)에서 지렁이가 됐다는 너’ 이러한 설명들은 수필의 맛을 삭감시킨다. 수필은 깨달음의 전달이지 정보 전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론 토룡탕 설화 부분을 들 수 있다. 요점은 지렁이가 보신에 탁월함을 표현한 것인데 장황하여 전체의 균형을 깨뜨린다.

 

지룡아, 너 가는 길 결코 순탄치만은 않아. 땅 속보다 땅 위는 몇 갑절 더 험난하단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과 자동차 바퀴, 너를 찍어낼 온갖 부리들이 나무 위를 날고 있고, 햇볕 아래선 개미 떼도 너를 물고 늘어질거다. 콘크리트 길 위엔 올라서지 마라. 제발 사람이 만들어놓은 콘크리트 길 위엔 올라서지 마라. 거기엔 물 고인 웅덩이도 있어. 한번 빠지면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한 너희들 모습을 나는 많이 보았단다.

 

인자한 아버지가 먼 길 떠나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이 결미 부분에서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문맥 속에 충만한 작가의 애정이 온기를 잃고 허공에 떠버린 느낌이다. 이는 갑작스러운 감정의 고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문에서 많은 분량을 토룡탕의 보신 탁월함에 할애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일관성이 결여된 데 주된 원인이 있다. 외형의 치중보다 내면의 정치(精緻)를 기하는 것이 수필의 맛과 멋을 획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한편의 수필이 형식과 내용의 조화, 곧 작품에 동원된 모든 요소들이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융합되어 맛과 멋을 동시에 획득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맛’에서 ‘멋’이 나왔다 하지만, ‘맛’과 ‘멋’에서 동의를 찾기 어려운 것과 흡사하다.

정성화의 ‘곰장어는 죽지 않았다’와 정호경의 ‘변비 체험기’가 획득한 맛과 멋의 조화는 주시할 만하다.

‘곰장어는 죽지 않았다’에서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문장이다. 비유, 묘사, 유추 등의 표현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실감을 불어넣고 있다. 새, 시계추, 아지매, 곰장어, 선지국 등 소재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화자의 내면표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구성은 표면상 현재`-`과거`-`현재`-`과거`-`현재를 교차시켜 안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두의 현재는 외로움에 멍한 상태의 현실이다. 여기서 새 그림자를 끌어들여 과거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야생마처럼 앞만 보고 질주하던 삶, 주위의 ‘독한 년’이라는 평판마저 무시하던 당당함. 그러나 현재는 무력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여기서 다시 끌어들인 것이 멈춰 있는 시계추이다. 화자는 새 건전지를 꺼내 시계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행위로 무력한 현실에서 탈출을 꾀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여기서 떠올린 게 곰장어구이집이다. 곰장어를 잡는 아지매의 야성. 발가벗겨져서도, 대가리가 잘려서도, 심지어는 연탄 화덕 석쇠 위에 누워서까지도 마지막 힘을 다해 몸뚱이를 뒤틀던 곰장어는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면서까지 인간에게 ‘생이란 악착같이 살아보는 정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미의 현재는 외로운 현실에서 무력증에 빠져 있는 화자가 야성을 되찾기 위한 행위로 선지국을 사다가 먹는다.

 

아지매는 참 독해 보였다. 그런데 곰장어는 더 독해 보였다. 나는 지금 그 아지매를 닮아야 할 것도 같고, 또 곰장어를 닮아야 할 것도 같다. 지금 내게 필요한 야성은, 내 안에 숨겨진 어떤 가능성을 찾아 내 몸의 오지(奧地)까지 찾아가는 탐험정신이다. 또 나의 가능성과 열정을 한데 모아 나를 새롭게 확장해 나가는 개척정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아 변용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줄기세포’를 찾아내는 일이다.

결미 부분의 자칫 소원(疏遠)할 수도 있는 이러한 독백이 오히려 절절한 호소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작품 전체의 저변을 관통해온 주제의식 때문이다.

 

정호경의 ‘변비 체험기’에는 수필의 맛과 멋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의 전통문학과 맥이 닿아 있는 이 수필에는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해학(諧謔)이 스며 있다. 문장은 평이한 가운데 은근한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구성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르고 있어 지극히 단순하다. 그런데도 ‘변비 체험기’가 수필의 맛과 멋을 획득하고 있는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30년 전에 위암을 만나 수술 후에 받았던 고통, 2,`3년부터 생긴 변비의 고통, 관장 체험, 변비약 과다 복용으로 인한 설사로 이어지는 스토리만으로는 어디에도 웃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고통이 이미 몸에 익은 달관자의 여유가 아니라면 견디기 어려운 형벌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절망이나 좌절을 자기 안에 수용하여 그것을 초월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 해학이다.

 

이런 경우 흔히들 막혔던 항문에서 오물이 폭포수처럼 터져나올 것을 대비해 화장지를 몇 통씩이나 준비해 놓는다고 했지만, 나의 경우 곱고 부드러운 황갈색 반죽이 방앗간의 떡가래처럼 한참 소리 없이 밀고 나오더라는 것이다. 나는 누워 있어 볼 수 없었지만 지속적인 힘씀으로 하나의 완성된 예술품이 빚어졌음을 나의 예민한 항문 감각으로 느껴 알 수 있었다. 일을 끝낸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옥동자를 분만한 임산부의 흐뭇함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담당 간호사는 신비에 찬 목소리로 누구에겐가 경과 보고를 하고 있다.

“1미터야, 1미터. 이렇게 고운 반죽의 장타長打는 처음이야.”

나는 못 들은 체하고 누워서 그 야만적인 의술에 감탄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부분(어휘, 문장 등)과 비형식적인 부분(소재, 주제, 작가의 태도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맛과 멋이 한꺼번에 우러나옴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변비 체험기’의 마지막 문장인 ‘내 늘그막에 뜻밖의 별난 체험이 하도 처량하고 부끄러워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몇 자 적어 후손에게 경계(警戒)삼아 전하고 한다’ 식의 결미는 우리의 고전문학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근엄해야 할 이 대목마저도 은근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문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인 진실성은 외적 대상에 대한 투철한 안목만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자아를 응시하는 냉철한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가지는 공명의 폭을 결정하는 요인은 형식적인 부분보다 비형식적인 부분에 더 크게 의지한다. 특히 수필에 있어서는 비형식적인 부분 중에서도 작가의 태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타 장르에서보다 크게 작용한다. 그렇다고 형식적인 부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수필의 맛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외형적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수필의 멋은 수필의 맛을 배가시켜 공명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다할 때 가치가 부여된다. 더불어 수필의 맛과 멋을 융합시켜 공명을 진작시킬 때 문학적 진실성은 획득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