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강물

 

                                                                                    유혜자

시내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역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는 코스를 자주 이용한다. 버스로 한번에 오는 노선도 있지만 당산철교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아름답고 시원해서이다. 합정역을 지나 열차가 지하를 벗어날 때쯤이면 나는 미리 자리에서 일어선다. 열차가 당산철교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시원한 한강, 작은 섬 건너 옛날 양화나루가 있었다는 아름다운 경치의 오른쪽을 보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치렁한 한강물에 뿌리를 담그고 있는 듯한 국회의사당의 뒷모습, 석양 빛에 물든 하얀 새의 날개가 샛강으로 접어드는 모습도 어쩌다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때문인지 강물을 보면 친근감이 든다. 강물의 흐름을 보고 있으면 아득히 흘러가버린 시간들과 만나게 된다. 강물이 처음부터 친숙한 것은 아니었다. 꿈이 아니면서 꿈같이 아련하게 내게 각인된 강물의 영상은 슬픈 것이었다. 두 살 때쯤 배를 타고 가던 막막한 시간을 생각한다. 작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던 것 같은 목선의 객실, 그때 무슨 일로 어머니는 나를 업고 가족의 배웅도 없이 강 건너 친척 댁에 가셨을까.

뱃머리는 친척 댁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길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객실에서 나는 하늘이 보이는 환기통을 쳐다보며 계속 울었었다. 부드럽게 얼르고 달래는 대신 말없이 엄숙하며 뭔가 슬픔을 안고 있는 것 같은 어머니의 기색에 더욱 겁이 나서 울었던 것 같다. 배에서 내려 친척 댁이 있는 마을까지의 거리는 왜 그렇게 멀었던지. 울음을 안 그치는 내게 “저것 봐라, 저것” 하며 달래는 건지 위협인지 모르게 어머니가 가리키던 시퍼렇게 출렁이던 강물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무언가 먼 것을 갈망하면 이따금 꿈에서 보게 된다. 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의 수렁에 빠졌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시간이 되살아난다. 끝내 알 수 없었지만 그때 어머니의 가출에 감춰진 슬픔의 빛깔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강물에 짓 광목을 빨아 강둑에서 바래는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방망이로 두들겨 빨아 푸르른 강둑에 펼쳐 널어놓았다. 그 위로 팔랑팔랑 하얀 나비가 달콤한 향기의 풀꽃을 찾아 날아다녔다. 평소 살갑기보다 엄했던 어머니도 물가에서는 찰랑찰랑한 내 기분을 맞춰주었으나 이따금 강물 따라 멀리 보내던 외로운 시선을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물이 파랗게 강둑까지 치렁하게 채워져 있으면 가슴이 철렁했고, 물이 빠져 둑 밑의 돌멩이와 풀잎이 드러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게 채워져야 할 것이 많음을 느꼈던가. 꿈이란 현실과 거리가 있어서 이뤄지기 어렵지만 빠져나갔던 강물이 다시 채워지듯 꿈도 이뤄질듯 짐작되었던 강가.

강물 앞에 서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사춘기, 강물 앞에서 흔들리는 내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학 가서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불가항력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조금은 후련하고 아프면서, 다듬어지고 힘을 얻었다. 내적인 힘으로 고통의 시련과 괴로움을 끌어안는 동안 가슴 속으로 흐르던 세찬 강물 소리.

언젠가 어머니에게 가출 이유를 물었으나 “세상엔 건널 수 없는 강도 많다. 크면 안다”는 모호한 대답에 당황했었다. 그러나 강물이야말로 바닥이나 그 안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아도 분명 존재함을 알 듯이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 옆자리에서 즐겁게 대화하며 가는 모녀를 보며 부럽다가도 침묵과 생략으로도 소통이 되었던 우리 시대의 모정을 생각한다. 그 모정처럼 강물과 우리는 철저한 침묵으로 하나되고 희망을 안고 흐르는 것으로 보게 된다. 파도라는 겁을 주지 않고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

어떤 암초나 장애물도 비켜서, 험한 세계의 복판도 뚫고 달려가고 너른 평야도 가로질러 물길은 바다에 닿는다. 자신의 어떤 불행도 인내로 이겨내면 물길이 바다에 이르듯 최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아셨을까. 강물은 그냥 무작정 흘러가는, 단순하게 밀려서 흘러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강물이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 물로 역동적이 되는 것처럼 어머니는 신앙의 힘으로 출렁거림을 다스렸다.

어렸을 때는 응석 받아주기에 인색했던 어머니가 자식에겐 수동적으로 살지 않도록 자주적인 능력을 키워주려고 서울로의 진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주었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 뻗어나가려는 나를 뒷받침해 주려던 배려를 깨우쳐주려는 듯이 반짝이는 강물.

탯줄로 함께 했던 처음의 이어짐처럼 오래 전 세상 떠난 어머니와 나는 강물로 진정하게 맞닿아 있다. 겉으로 엄격하고 이성적이었지만 넓은 세계로 이끌어주려던 그 이중적 구조 속에 숨겨놓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자질구레한 보살핌보다 강 밑바닥에서 맑고 세차게 흐를 수 있도록 물길을 터놓으려던 어머니의 바람이 가슴을 오래도록 울리는 것이다. 나는 어디쯤 흐르고 있을까. 무의미한 삶을 되돌아보며 강물 저쪽에서 제시하고 있을 무엇이라도 찾아질 것처럼 강물을 내려다보는 때도 있다.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강, 무력감에 휩싸이지 않고 출렁이며 휘돌아가는 물줄기를 따라가고 싶다. 사랑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출렁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