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쓰기

 

                                                                               金鎭植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 빛바랜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오십여 년 전, 사춘기 때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때는 무척 심각하게 쓴 이야기 같은데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풋내가 나는 지난 일이기도 했지만, 반세기란 세월이 싱그러움을 소진해 버렸다고 할까.

그러나 그 일기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정성껏 꼬박꼬박 쓴 며칠을 빼고는 건성으로 건너뛰다가 그쳐버렸다. 아마 이런 일은 나에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시작 때는 끈기 있게 쓰겠다고 다짐하지만 며칠을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만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신과의 약속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얼마나 지켜내었을까 하고 돌이켜보면 여간 부끄럽지 않다. 어느 것이나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능력에 부치는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 성싶다.

누구나 그 나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예사스러운 일로 끈기 있게 이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끈기가 오래 가지 못하여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기 일쑤였다.

물론 자잘한 핑계나 구실이 없을 수가 없지만 어떤 일이든지 장애가 따르고 고비가 있게 마련이다. 그 장애와 고비를 넘기지 못한 셈이다. 그만큼 뜻이 여려 다급하지 않았고, 게으름에 취해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흔히 다잡아서 하는 말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스스로 믿을 수 있는가’ 하고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물음일 게다.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끈기 있게 꾸준히 하면 이룰 수 있는 일도 약속을 미루다가 때를 놓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일기뿐만 아니라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도 그랬고, 건강을 볼모로 뒷동산을 오르기로 한 약속도 며칠을 가지 못하였으며, 이 밖에도 섬기기로 하면 줄을 잇고 있다. 이처럼 시작만 있고 이어가지 못했으니 살아가는 일에도 자연히 아쉬움을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을 수 있다’고 흔쾌한 답을 내놓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불신하는 얘기도 대놓고 하기가 편치 않다.

나의 일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인연을 맺어 왔고, 그 필요성을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친한 벗이 되지 못했다. 때로는 방학 숙제로 내 뜻과는 상관없이 개학 무렵에 이르러서야 한꺼번에 며칠씩 소설처럼 지어 쓴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철이 들면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고 제법 진지한 마음으로 시작하였지만 한 번도 끈기 있게 이어가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예사로운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일기를 꾸준히 써 오고 있는 분에게는 우선 존경스럽고 믿음이 간다. 그만큼 뜻이 굳고 성실성을 담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스로의 삶을 매일 돌아보는 눈을 가졌다면 그 마음인들 흐려질 수 있겠는가 싶다.

이런 삶을 늘 생각하면서도 일기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음이 여리고 끈기가 없으며 게으름의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엄하지 않았고, 시간은 있어도 틈을 내지 못하였으니, 때가 이르러도 거둘 것이 없게 된다.

이처럼 나의 삶은 시작만 있고 가꿈과 거둠이 생략된 허점투성이여서 안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때가 많았고, 아차 하다 보면 계절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의 일기쓰기도 새해 아침이라도 맞으면 새사람이 된 듯 작심을 하고 며칠을 쓰다가, 징검다리처럼 건너뛰다가, 시들해져 밀쳐버리고 해를 묵히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그런데도 또 일기 쓰는 일을 지워버리지 않고 있으니 그 업장(業障)만은 깊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젠 다짐하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일기와 사귀며 삶을 그려가고 싶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가당치도 않고, 쓰고 싶을 때 담담한 마음으로 메모하듯이 한 줄이라도 적으면 된다. ‘그것이 무슨 일기가 될까 보냐’라고 하더라도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가함을 나눌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무슨 계절이나 게으름 따위를 탓하지 않고, 편리한 곳에서 여느 때나 계절인 듯 게으름인 듯 그려놓으며 과거의 단절을 복원하고 싶다. 내키지 않으면 며칠씩 빼먹은들 어쩌랴. 이젠 약속 따위를 지켜가기가 위해서가 아니라, 일기라는 벗과 사귀며 즐기는 마음으로 가까이 하고 싶다.

오십 년 전의 빛바랜 일기장의 싱그러움을 소진해 버린 지금 담담한 마음으로 또는 이전의 지워버린 여백으로 일기와 벗하고 싶음은 약속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한가롭게 거닐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