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회상

 

                                                                                    엄정식

나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아버지에 관해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 모습도 한 장의 낡은 흑백 사진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다는 것도 철이 들면서 어머니나 누이들 혹은 친척을 통해서 들은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누군가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매달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그것은 아버지가 나의 삶을 지배한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럴듯하게 설명을 해 준 적이 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가 어떻게 나의 삶을 지배해 왔다는 것일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아버지와 가까이 살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여섯 살 때인가 어떤 계기로 같이 놀던 아이들이 아버지를 따라 제각기 흩어졌을 때 혼자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투덜거리던 이후 나는 어떤 형태로든 아버지를 의식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유학 시절에도 제사를 거르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 어떤 틀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성격의 형성, 선친의 고향인 당진의 어느 농가와 인연을 맺은 이유 등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아버지와 무관한 것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이다. 아마 내가 왼손잡이인 것도 그 중에 하나일지 모른다.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다.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이 바로 우리 집 앞에 있었으므로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우연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단편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왼손으로 소를 몰고 가는 모습을 보고 자기 아들임을 확신하게 되는 그 장면을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큰 감동을 느꼈다. 옛날에 읽었을 때는 그렇게 가슴이 메어지는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었다.

그렇다. 내가 왼손잡이인 것은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유가적인 문화의 전통에서 내가 왼손 질하는 것을 방치할 수 있었겠는가. 공을 던지고 과일을 깎거나 물건을 들 때 주로 왼손을 사용하는데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테니스 라켓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테니스만은 오른손만을 사용하여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효도하는 심정으로 견디어 낼 것을 다짐하였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지만 궁극적으로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약속인 것이다. 그렇게 테니스 레슨이 시작되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테니스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라켓 자체를 고정시켜서 쥐고 있는 것이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벌써 라켓과 손바닥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이것을 휘둘러서 공을 맞추고 나면 이미 라켓이 15도 정도 돌아가 있으니 공이 제대로 쳐질 리가 없었다. 번번이 공을 헛치거나 다른 방향으로 쳐내기 마련이었다.

20대 초반의 건장하고 잘 생긴 코치가 자세와 쥐는 방법을 다시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5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자세는 다시 흐트러지고 라켓은 손아귀에서 따로 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코치도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참다못한 그는 혼자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여자나 애들만도 못해…….”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나는 변명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꾸중 듣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통해서 나의 왼손잡이 버릇을 교정하며 야단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때로는 우울하고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나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체험해 보는 아버지와의 대면인가. 심지어 미묘한 쾌감 같은 것을 느끼는 적도 있었다.

그러한 내 태도에 대해 오히려 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열흘 가량 지났을 때 드디어 나는 이른바 ‘스트로크’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백 핸드’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 것을 축하해 주었다. 웬일인지 나는 그것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다. 방향도 정확할 뿐 아니라 공도 강하게 칠 수가 있었다. 아마 왼손의 힘이 간접적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코치는 매우 기뻐하고 예기치 않게 많은 격려와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무척 흡족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러한 형태로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확인하려 들지는 않는다. 벌써 환갑이 지났고 큰아들에게서 손자를 보았을 정도로 충분히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선친의 고향인 당진읍 근처의 한적한 마을에 농가를 마련한 다음 아버지가 사시던 마을을 찾는데 실패한 이후로 마음을 정리하게 된 바도 있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가서 당진군 행정직원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살던 마을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가 13세 어린 나이로 그곳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났으니 친척이나 친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엄씨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는 곳을 찾아가 보았으나 또다시 허탕을 쳤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마을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어떤 노인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손을 맞잡으며 반색을 하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서나마 아버지를 찾으려는 오래되고 집요한 그 여정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그 누구 못지않게 아버지와 밀착된 관계를 유지해 왔고 고향도 찾아드렸다고 믿는다.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도 당진 땅에서 나온 곡식과 과일을 제물로 사용함으로써 결코 귀향해 보지 못했던 한을 위로하고자 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정도로 노력을 했고 충분히 많은 세월이 지났다고 본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혈육을 바람직하게 길러내서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있는지 하는 궁금증이다. 그것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취하게 될 나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에 대한 회상은 나 자신에 관한 상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