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채

 

                                                                            오세윤

지난 가을, 지방에서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수필문학상에 도전했다 보기좋게 낙선했다. 이만한 글이면 되겠지 하는 오만한 자신감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그 다음 달, 같은 작품으로 출신교인 서울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제정한 문학상에 응모했다. 선후배 중에는 이름을 얻은 소설가도 여럿 있는데다 기자생활을 하거나 왕성하게 문필활동을 하는 이들도 적지않아 한번쯤 도전해 본다 해서 그렇게 남 우세스러울 것도 없었다.

고맙게도 대상이 주어졌다. 송년회 겸 정기총회를 하는 자리에서 수상을 했다. 많은 동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동기회에선 축하 화환까지 준비했다. 화려한 꽃다발도 세 개나 받았다. 박수도 받았다. 부상으로 노트북도 하나 받았다. 기쁘면서도 쑥스러워 행사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이라고 타본 게 과연 얼마만인가.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겐 상복이라곤 없었다. 초등학교 때 받은 개근상 네 번이 전부였다. 공부는 잘한 편인데도 우등상은 한번도 못 탔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물론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 할까. ‘저런 친구가 고등학교는 어떻게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왔지? T`의대는 어떻게 들어갔지? 낙제도 안하고 어떻게 제때 졸업은 했을까.’ 의아하여 쳐다볼 사람이 한둘이 아닐 듯싶다.

돌이켜보니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상이 하나 있기는 하다. 전공의 3년차일 때, 국가의 보건시책에 따라 6개월간 무의촌 진료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대천 인근의 면 보건지소는 크기라야 20평 정도로 진료실 겸 치료실, 방 둘에 주방이 딸린 최소한의 규모였다. 외래환자만 볼 수 있었다. 밤잠도 설치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병원생활에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우리들에게 파견근무는 숨통 트이는 훌륭한 휴식기간이기도 했다.

수당도 월급의 세 배를 받은 터라 생활에도 제법 여유가 생겨 좋았다. 겨울 한 달은 방학을 맞은 식구들이 내려와 함께 지내다 갔다. 식구들이 올라간 다음부터는 혼자서 밥을 차려먹는 스스로의 모습이 여간 궁색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귀찮기도 했다. 이웃 집에 부탁해 식사를 해결했다.

파견근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3월 중순쯤 동네 위 외딴집에 불이 났다.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사는 과수댁이었다. 마침 보건지소에는 식구들이 올라가면서 남겨둔 쌀이 세 말쯤 독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음 날 바로 자전거에 싣고 그 집을 다녀왔다. 근무기간이 끝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면 저걸 어떻게 하나 하고 가볍게나마 부담스러워하던 차라 제창 잘됐다 싶어 마음도 홀가분했다. 그 일은 바로 잊어버렸다.

병원에 복귀한 다음 날, 과장께서 보사부를 다녀오라고 했다. 생각지도 않게 표창패를 받았다. 선행과 헌신적 의료봉사에 대한 표창, 부끄럽고 황당했다. 주말을 이용한 것이기는 했지만 겨울의 해수욕장과 인근의 도서지방을 두루 돌아보게 된 귀한 기간의 고마움이 오히려 컸는데 표창을 받다니, 그것도 남아 있던 쌀 세 말에. 얼굴 뜨겁게 받아가지고 왔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 뒤로 연이어 정말로 낯뜨거운 짓거리를 했다.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얼마 지나 낯선 동네에 개업을 하게 되자 무언가로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나타내어야만 유리할 듯싶었다. 별 생각 없이 그때의 표창패를 걸었다. 몇 달이 지나자 단골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의 속엣말도 나누게 되는 친분들이 생겨나게 됐다. 하루는 그 중의 한 환자가 넌지시 물어왔다.

“보건지소에도 계셨군요. 선행을 많이 하셨나 보죠?”

부끄러워진 나는 딴청을 하는 것으로 우물쭈물 그 궁지를 비켜났다. 그날 밤 내내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다음 날로 바로 상패를 치웠다. 처치 곤란이던 쌀 세 말로 엉뚱하게 받은 선행상, ‘나는 선행을 베푸는 의사’라고 광고한 그 몰염치함, 상패를 치우고도 참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나타난 결과만으로 상을 받는다는 건 재능만으로 찬사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유쾌하지 못하다. 상도 각고의 노력과 공력이 바탕이 되어 받게 되었을 때에야 참되게 빛이 나는 게 아닐까. 여인의 미모도 영혼이 담겨야 진정 아름답듯, 재능도 열정으로 담금질되었을 때에야 상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물려받은 그대로의 미와 재능은 그렇게 뽐낼 일만은 못되는 성싶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는 한다.

글쓰기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듯하다. 독서와 사색과 체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는 끊임없는 탐색, 좌절을 이겨내는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만 상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생각을 한다. 공로에 대한 상과 갈채는 받아 마땅하기는 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게 과연 갈채를 받고자 함이었던가. 칭찬에 귀가 솔깃해지면서 글을 쓰는 것에도 점점 더 인정받기를 은근슬쩍 바라는 속물스러워진 자신을 본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는 일이 육신적 욕구라면 상과 갈채를 탐하는 일은 정신적 허기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둘 모두 삶에 위안과 기쁨이 되기는 한가지일 것도 같다. 인정과 갈채를 바라는 일도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욕망을 절제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그것들이 모두 기쁨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인기를 의식하게 되면 글쓰기의 초심은 이미 잃어진 상태가 된다. 갈채와 상과 인기, 인정을 받고자 연연한 이 며칠 나는 전혀 자유스럽지 못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일찍이 허균이 일렀다. ‘옛글을 널리 읽어 학력을 키우고, 스승에게 나아가 식견을 넓히고 스스로 되풀이 깊게 익혀 공정(功程)을 쌓으라’고 했다. 삼요(三要)를 말한 선학(先學)의 한 마디가 오늘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으로 온다.

 

 

계간 <시와 산문>에 수필로 등단(2004년). 선농 사이버문학상 대상 수상(2005년).

한국 문인협회 회원. 에세이포럼 회원. 소아과 전문의.

산문집 『바람도 덜어내고』, 『은빛 갈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