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조한숙

조선시대 문인,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녀 교육에 대한 글이다.

‘나이 어린 자제가 누워 자기나 좋아하고, 어른이 가르쳐 경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며, 그저 절제 없이 놀려고만 하여… 때문에 어린이의 교육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이덕무가 살던 1700년대에도 놀기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어른 말씀 안 듣는 소년들이 꽤 있었는가 싶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 있는 이가 어디 이덕무뿐이랴. 고금을 통해서 자식 교육에 관심 없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 교육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일 테니까.

우암 송시열도 자녀 교육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시집가는 딸에게 써서 보낸 『우암계녀서』는 유명한 글이다. 대유학자에게 그런 세세한 구석이 있었는가 싶게 조목조목 적어서 주의를 주고 또 다짐하고, 타이르고 하면서 어린 딸에게 계녀서를 들려 시집을 보냈다. 누구나 계녀서를 읽으면 따뜻한 부성애에 놀랄 것이고, 그 자상함에 또 한 번 놀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는 요즈음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어 서점에 나와 있다. 『안도에게 보낸다』는 그 책을 손에 들고 읽어나가면서 그런 할아버지를 모시는 안도가 어찌나 부럽던지, 할아버지의 온유한 가르침과 손자 사랑하는 마음이 편지마다 넘쳐흘렀다. 그 시절 인편을 통해 그렇게 빈번히 편지가 오고갈 수 있었는지, 아들보다 손자를 더 사랑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특히 안도가 혼례를 치렀을 때,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일러주었다.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므로 지극히 조심해야 할 처지이며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마침내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를 들어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이혼을 쉽게 하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대목일 듯하다.

우리나라뿐이겠는가. 가까이 중국의 문인들, 도연명도 제갈량도 사마광도 주희도 자녀 사랑이 지극했고 그들 교육을 고심했다.

동진시대 전원시인 도연명은 유난히 아들이 많았다. 서(舒), 선(宣), 옹(雍), 단(端), 통(通)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장성하자 어릴 적 이름을 치우고 엄, 사, 분, 일, 동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들 다섯이 한결같이 공부에 마음이 없어서 아버지 도연명의 속을 썩였다.

 

‘서란 놈은 벌써 열여섯 살이건만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고, 선이란 놈은 곧 열다섯이 되는데 학문을 싫어한다. 옹과 단은 다같이 열세 살인데 여섯과 일곱도 분간하지 못하고, 통이란 놈은 아홉 살이 가까웠건만 그저 배와 밤만을 찾는다. 하늘이 내리신 자식 운이 이러하거늘 술잔이나 기울일 수밖에.’

 

도연명집 권3에 나오는 ‘책자’라는 글이다. 가난 속에서 춥고 배고프게 키운 자식들이라서 애처로움에 모질게 야단도 못 친다.

술 좋아하는 도연명은 불초한 자식 생각에 술 한 잔을 기울인다고 했다.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1500여 년 전 도연명이건만 자식 걱정은 강남의 극성 엄마와 다를 바가 없다.

다섯 중에 옹과 단은 동갑이다.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자식들이 아닐 것이다. 혹은 쌍둥이였는지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아무튼 도연명 슬하에는 이복 자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도연명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비록 같은 어미에게서 난 형제들은 아니지만 사해의 모든 사람이 형제가 아니냐”며 자식들에게 우애 있게 지낼 것을 부탁했다. 춘추시대 도타운 우정으로 만고에 알려진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管鮑之交)를 예로 들어가며 아들들에게 편지를 썼다. 관중과 포숙은 서로 시기하지 않았으며 모은 재물을 나누는데 터럭만큼도 셈을 따지지 않았다고 했다. 남도 그렇거늘 하물며 너희들은 이복형제라 하더라도 같은 아버지 밑에서 나온 형제들이니 돈독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했다.

엄아, 사야, 분아, 일아, 동아, 다섯 아들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면서 아비의 간곡한 마음을 띄우는 평범한 아버지가 도연명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아버지도 자식들 가르침에 힘을 쏟던 아버지 중 한 분이셨다. 내 아버지는 이덕무처럼 명문장가도 아니고, 도연명처럼 유유자적하던 전원시인도 아니니 그들처럼 명문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은행에 다니시던 평범한 아버지로서 자식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관심과 비례해서 우리들에게 자연히 꾸지람도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의 지엄한 훈계를 아주 싫어했다. 그 무렵이라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닐 즈음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나에게는 잔소리로 들려왔다.

아버지는 당신이 부르시면 입에 들었던 음식을 뱉고라도 대답을 하고 달려와야 한다는 유교적인 지론을 가지고 계셨다. 집에서 외출할 때는 다녀오겠노라고 인사하고 나가야 하고, 돌아와서는 다녀왔다고 부모님께 아뢰어야 했다. 학교에 오갈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른이 수저 들기 전에 먼저 들어서는 아니 되고, 늦게 귀가한 날 혼자 밥상을 받았을 때, 부모님께 드셨느냐고 여쭙고 먹어야 했다. 어른들이 말씀을 하실 때는 경청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볼이 부어서 인사도 안 하고 학교에 가는데 아버지는 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하는 수 없이 울면서 아버지께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 무렵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인사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아침마다 동네 친구들 몇이 어울려 함께 학교로 향하곤 했는데, 친구 어머니들이 나를 말할 때, 인사 잘하는 아이로 지칭한다고 했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구십을 바라보신다. 그 시절 유교적인 가르침을 받은 분이니 그런 자식 교육은 당연한 것이리라. 아버지의 호된 가르침이 이제 와서 고맙게 느껴지니 미욱한 자식일 따름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소학』이나 『명심보감』에 의존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예절들인데 그때는 왜 그리 싫었던지, 나야말로 이덕무가 걱정하던 어른 말 듣기 싫어하던 불초한 자식이 아니었던가 한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미욱한 자식의 뒤늦은 깨달음을 좋아하셨을 텐데.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수필산책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현 한경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수필집 『초록빛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