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읽는다

 

                                                                              신진숙

도시의 숨소리를 잊게 하는 작은 숲길을 찾았다. 실은 하도 낮은 산이라 마냥 미뤄놓은 집 앞의 산책로다. 그랬던 그 길이 요즘 내게 평온한 시간을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내 마음의 길을 새로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전에 즐겨 다녔던 직선의 넓은 공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작용이다.

숲이 훤히 제 몸을 드러내고 있는 계절이라 길의 호흡이 그대로 와 닿는다. 경사가 완만한 구불구불한 흙길에서 흔적을 읽는다. 누군가의 흔적으로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네 살이 또한 주고받는 호흡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길은 곧 소통의 의미이니.

흐름이 있는 산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다. 왠지 가보고 싶어지는 오솔길도 있고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길목도 만나게 된다. 살면서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서는 일도 그와 같으리라. 더러는 돌아 나와야 하는 외길도 있고, 가까운 데를 한참 돌아서 가기도 하고, 외로움 타는 호젓한 사잇길에 한눈을 팔기도 한다.

산을 찾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봄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숲이 진달래 개나리 빛으로 화색이 도는가 싶더니 이내 신록이 살금살금 자릴 잡고 들어선다. 신록이 만들어낸 길의 변화가 새삼 재미나다. 보랏빛 제비꽃, 샛노란 애기똥풀 등 앉은뱅이 들꽃들은 그대로가 아름다운 문(장紋)章이다. 도시의 길에서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고유의 언어를 만나는 특별함이 있다.

초록의 옅은 숨소리가 이상 고온 탓에 숲길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 생경하다. 얼마 전까지 걸었던 길의 기억이 갑자기 아득히 사라져버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최근 기억의 근간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푸념을 해대긴 했지만 발 밑에 떨어진 그 낯설음이 어이가 없다. 비약하자면 어제인 듯 오늘인 듯싶다. 익숙했던 길에서의 이런 착각은 어쩌면 하루하루가 정말 다른 세상의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부드럽고 화창한 명지바람에 오월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무들을 볼 때면 꼭 스무 살 시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이 품었던 기억의 그늘은 그야말로 아스라하다. 누군가는 오월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달月은 없어도 된다고 극찬했지만, 오월이 그토록 빛나는 것은 다른 계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춘이 얼마나 빛나는 지를 청춘에서 멀리 비껴가 있을수록 절실히 느끼게 되지 않던가.

송홧가루, 아카시아 향기가 곳곳에 뿌려지고 있다. 이제 꽃들은 지고 향기로 채워지는 숲이다. 아마도 마흔 그 즈음, 나의 산길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여 공연한 웃음을 흘려본다. 내가 언젠가 길을 잃었던 때는 분명 황량한 겨울 숲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려진 것 하나 없이 온통 길뿐인데 어찌 길을 잃었으랴.

신록의 빛으로 눈 멀었거나 숲 향기로 길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수려한 나무 그늘에 한없이 앉아 있었던가. 옷깃을 잡는 소슬바람과 울음 같은 단풍도 한 몫 했으리라. 나는 이내 그럴듯한 변명을 한다. 살다 보면 목적지보다 도중에 만나는 길의 풍경에 마음 끌릴 때가 있는 거라고. 그로써 충분하다고.

어느 시(詩)에서,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산길 하나를 발견한다. 비탈진 산길을 오를 때면 나무는 계단이 되어 사람들을 편히 오르내리게 하고, 비가 와도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으로 누워 있다. 나무의 그런 쓰임새를 보며 이 시대에 나무 같은 사람이 그립다는, 시인의 마음이 담긴 길을 따라가 본다.

혼자 걷는 숲길은 내면의 고독을 만나는 시간이다. 걷다 보면 생각의 걸음도 차분해진다. 생각이 고요하지 않을수록 마음을 온전히 싣게 되는 것 같다. 산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마음의 이정표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산을 내려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료했던 그것들을 간단 없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 내성 때문에 사람들이 수시로 자연을, 산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자연에 귀의한 이들을 보면 몸 전체에 선함이 그대로 배어나오지 않던가. 마치 수도사들의 그것처럼.

문득 멈춰 서서 나무의 상처를 읽는다. 뿌리 깊은 나무와 들숨 날숨을 서로 나누다 보면, 나무는 나무 그 이상으로 보인다. 척박한 땅에서도 줄기가 휘고 뒤틀리며 옹이 박혀가며 꿋꿋이 서 있는 나무. 하늘을 향해 뻗어간 가지만큼이나 흙 위로 드러난 뿌리의 몸에서 강한 생명력을 본다. 아, 뿌리마저도 길이 되다니…….

아마 맨발로 흙길을 걸었다면 자연과의 감응(感應)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수천, 수백 년이라는 시간의 내공으로 만들어지는 숲의 흙은 자연의, 향기의 보고(寶庫)다. 나의 시선(視線)으로 그 깊은 것들을 담으려 하니 당연히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르는 게 어디 산에서 뿐이랴. 아직 내가 읽지 못한 길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리라. 그러다 내 마음 닿는 곳이 많아지는 날, 천지 사방이 나를 향한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만나게 되리라.

길을 무작정 따라가라 했던가. 가다 보면, 쉬다 보면 길이 보인다고…….

 

 

고양 <강촌수필> 동인.

시집 『열리지 않는 창』, 수필집 『내 안의 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