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카데미 제9회 강좌 요지]

 

프랑스적인 수필

 

                                                                                 정명환

편집자가 내게 준 제목은 ‘프랑스 현대수필의 동향’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 적은 두 가지 이유로 이 제목에 합당한 글을 쓸 수 없어서, 그 대신 혹시 프랑스적인 ‘수필’이라는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첫째로는 개념의 문제가 있다. 만일 essai라는 프랑스 말을 굳이 수필이라고 번역한다면 양자간의 개념이 어원적으로도 또 현실적으로도 맞물리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송나라의 홍매(洪邁)가 “子老習瀨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後先 無復詮次 故目之 曰隨筆”이라고 말했을 때의 수필과 몽테뉴가 말하는 essais의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공통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홍매의 경우에는 수필이란 주로 유식자의 마음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무릇 느낌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적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3국의 수필의 저류가 되고 있다. 그런 뜻에서의 잘된 수필은 비교적 짧고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글에, 자연과 인생에 관해서 수시로 갖게 된 개인의 체험과 감상을 담아넣어, 독자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글들이 바로 이 <수필>이란 잡지를 수놓아 오고 있기도 하다.

이에 반해서 몽테뉴는 자기의 essais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 내가 적어놓고 있는 잡문들은 결국 나의 일생의 essais의 기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오히려 흉내내지 말아야 할 본보기로서 얼마큼이라도 소용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분히 아이러니컬한 이 문장에서 우리는 ‘나의 평생의 essais의 기록’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essais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시도, 경험, 성찰, 모색, 정신적 궤도 등 여러 단어가 떠오르지만,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에서의 ‘수필’이라는 말은 부적절하다. 그래서 그 방대한 내용을 담은 책의 제목 자체인 Essais를, 『수필집』보다는 좀더 중후하게 들리는 『수상록』이라고 옮겨놓은 것이 일본의 경우였고, 어떤 전공자들은 그대로 『에세』라고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몽테뉴의 ‘에세’의 전통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 자기성찰로 되돌아오면서 지혜를 모색한 이만한 대저(大著)를 우리는 달리 알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이후 ‘에세’라는 말 자체는 더욱 넓은 의미에서 널리 쓰이게 되어 시, 소설, 희곡으로 분류될 수 없는 문학적인 글들과 엄격한 논증적, 체계적 언어로 짜여져 있지 않은 사상의 표현들은 그 장단(長短) 여하를 불문하고, 그리고 프랑스의 국경을 넘어서서 모두 ‘에세, 에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중에는 존 록의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나 베르그송의 『Essai sur les donnёes immёdiates de la conscience』와 같은 저명한 철학책도 있고, 또한 우리는 니체의 모든 글을 에세이라고 카테고리로 묶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 에세나 에세이라는 말을 수필이라고 옮겨놓기는 전혀 적합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맞물리기 어려운 ‘수필’이라는 말과 ‘에세’ 또는 ‘에세이’라는 말을 엄격히 구별할 객관적 기준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서정적이며 비근한 일상사(日常事)를 다룬 짧은 글을 수필이라고 부르고, 깊은 사색을 담은 비교적 긴 글을 에세이라고 부르자고 누가 제안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제안에 선뜻 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비교적 긴 서정적인 글 속에 깊은 사색이 담겨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알베르 카뮈), 반대로 짧은 글로 아로새겨진 사색의 행간에 서정이 깃들어 있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알랭).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의 고식책(姑息策)으로, 수필이라는 말의 뜻을 넓히는 한편, 에세이라는 말의  뜻을 좁혀, ‘문체가 지적(知的)이건 감성적(感性的)이건 간에 전문 분야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인생의 제반사(諸般事)에 관한 구체적 성찰을 시도한 글들’을 우리의 귀에 익은 ‘수필’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려 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에 내가 말한 바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어색하지만 몽테뉴의 글조차 ‘수필’에 포함시켜서 ‘프랑스적 수필’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수필이라는 말과 에세, 에세이라는 말을 간신히 자의적(恣意的)으로 버무려보았지만 나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프랑스 현대수필의 동향이 어떠냐는 물음에는 아무래도 응답할 자신이 없다. 오늘날에는 현대란 1970년경부터의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끄럽지만 그 무렵부터 쓰여진 프랑스 사람들의 수필을 읽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이나 거대담론의 붕괴가 화제의 중심이 되고 세계화, IT 산업, 유전공학 등이 인간을 어떻게 변모시키느냐는 문제가 큰 관심의 대상이 된 ‘현대’에 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전반적 고찰을 한 일이 몇 번 있기는 하다. 그러나 특히 프랑스 사람들이 그들의 수필을 통해서 이 시대적 특징에 어떤 반응을 보여왔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읽은 수필은 기껏 20세기 전반기까지의 것들인데, 혹시 그 시대를 아직도 현대로 치부할 수 있다면 한 가지 할 말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 무렵까지도 프랑스인들의 수필의 한 두드러진 경향이 소위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지켜나온 데 있었다는 것이다.

한데, 이 ‘모랄리스트’라는 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 말이 프랑스의 수필가나 작가에 대해서 사용될 때에는 도덕론자, 도학자, 설교가와 같은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격, 습성, 심리, 한계 등 요컨대 우리가 인간성이나 인간조건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가하고, 그 인식과 관련시켜서 인간 행위의 실태와 가능성을 생각해 보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누구보다도 ‘수필’의 원조인 몽테뉴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을 두고 한 일은 자기 자신이 취약하고 무지(無知)한 존재임을 밝힌 것이며, 그가 얻은 효과는 장기간에 걸친 그런 자기성찰의 덕분으로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러리라는 보편적 판단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종국적으로 도달한 지혜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삶을 조촐하게 향유할 수 있는 길을,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통제된 쾌락’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랄리스트들을 모두가 가식 없는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현실을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몽테뉴의 경우처럼 지기의 무릇 체험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체험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추상화 되기도 하고 압축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

라로슈푸코는 잠언의 형식을 취하고, 파스칼의 『팡세』는 단상(斷想)으로 되어 있고, 알랭은 그가 ‘프로포’라고 부른 형식 속에 그 매력적인 역설을 담아 넣었다.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내린 처방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몽테뉴가 인간의 조건을 철두철미하게 따지는데 지혜의 시작이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알랭은 때로는 사고의 중지야말로 행복의 길이라는 세지(世智)의 편에 섰으며, 카뮈는 이른바 부조리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에 항거하려는 이중의 태도에서 삶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인간이란 무엇이냐는 근본적 반성을 그들의 사고와 행동의 밑에 깔고 부단히 그 문제로 되돌아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프랑스 수필에 있어서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모랄리스트로서의 자세가 과연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사는 프랑스의 새로운 수필가들에게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는지, 혹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는지 앞으로 살펴볼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 다만, 어느 젊은 불문학자의 말을 들으니, 오늘날에도 역시 그런 자세를 지니면서 시대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프랑스 수필가의 특색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피상성(皮相性)이 지배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특징을 다루면서도 피상성의 기류에 휘말리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든다.

 

 

1929년 생. 서울대학교 및 가톨릭대학교 교수 역임(불문학). 현재 학술원 회원.

저서 『한국작가와 지성』, 『졸라와 자연주의』, 『문학을 찾아서』,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수필집), 『젊은이를 위한 문학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