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탈속(祝 脫俗)

 

                                                                                    김병권

지난해의 마지막 달은 꽤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월초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의 부음이 밀어닥쳐 사흘거리로 여섯 군데나 문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백 년만에 엄습했다는 강추위 속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그만 독감까지 걸리고 말았다.

속담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한 말처럼 나는 그 덕분에 연말연시를 집안에만 박혀 쉬었다.

하지만 쉰다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몸은 비록 쉬는 상태에 있다 해도 온갖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정신적인 휴식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의 의미를 곱씹으며 다정하게 지내던 얼굴들을 회상해 보았다.

한 달이면 두서너 차례 만나던 친구, 거의 매일같이 전화 안부를 교환하던 친구들이 돌연히 곁을 떠나게 되니 그들과 얽힌 추억들이 새삼스러운 그리움으로 되살아났다.

영전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면서 쳐다보니 사진 속의 그 친구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반길 것만 같다. 그러나 종내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안부를 물으며 담소를 나누었는데…….

문우 S씨는 간경화증으로 투병하다가 중국에 가서 간 이식수술을 받고 돌아왔다. 다행히 젊은 사람의 간을 구하게 되어 수술도 성공적이었다고 무척 좋아했다. 앞으로 조용히 요양하면서 기다리노라면 차츰 기력도 회복될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자못 컸었다. 내 생각으로도 이제 영양섭취만 잘하면 곧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던가. 수술 후유증이 갑자기 악화되어 몇 차례 병원을 오가더니 영영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기사회생을 꿈꾸던 우리의 기대는 한낱 희망사항으로만 끝나고 만 셈이다.

그리고 문우 Y`씨는 매월 두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였다. 한 번은 ‘문단화요회’ 회원으로, 또 한 번은 ‘문인선교회’ 회원으로 거의 어김없이 만나는 고정 멤버였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문단 행사 때마다 단골 메뉴라 할 정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래서 가족 간에도 격의 없는 사이로 교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만성적인 위장장애로 오랜 동안 투병생활을 했지만 일체 내색 없이 문단 행사 때마다 개근(?)을 했다. 특히 12월 2일 고 조경희 선생 추모의 밤 행사 때에는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겹게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매사를 빈틈없이 정확하게 처리했고, 그 어떤 약속이든 꼭 지키는 성실함을 보여준 그는, 그래서 우리들 마음 속에 영원한 성실인의 표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어김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도 세계 최고의 정복자를 자처하던 칭기즈칸도 운명의 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교육자는 “내가 죽거든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축복의 찬송가나 불러 달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고인을 기린다는 조상(弔喪)의 의미도 기실 고인에 대한 위로라기보다 살아남은 사람끼리의 인사치레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울한 슬픔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밝은 세상에 나와 함께 웃으면서 살아가자는 뜻으로.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잠기다 보니 불현듯 몇 해 전에 타계한 미당 시인의 장례식 때 일이 떠오른다.

조문객으로 참석한 방송극작가 H`씨가 방명록에 서명하면서 ‘축 탈속’이라고 쓴 부의금 봉투를 내밀었다. 이때 안면 있는 한 후배가 “선생님! 혹시 착각하신 것은 아닙니까. 죽음을 축하하신다니요?”라고 하며 새 봉투 하나를 내놓으면서 다시 쓰기를 권했다.

그러자 그분은 “어허. 이 사람아!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라면, 축복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보내야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과연 대작가다운 기발한 발상이라 하겠다.

또한 근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학자 C씨가 모 대학병원에 입원한 후배를 찾아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대체 병명이 무엇이라고 하던가?”라고 묻자, 환자는 힘이 쭉 빠진 말투로, “글쎄 간암이라고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그러면 축하할 일이구먼” 하면서 다시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하는 말이, “우리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갑자기 죽는 경우도 허다한데, 암이라고 하면 일단 예고된 죽음이니 그것만으로도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공직에 있는 사람이 법에 의해 몇 년 후면 퇴직된다고 할 때, 그는 미리부터 불안해 할 필요 없이 그 후의 일을 대비하는 것처럼 말일세.”

환자도 문병객도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아마 환자를 위로하는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들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 말의 깊숙한 내면에는 수많은 담론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굳이 원효사상(元曉思想)이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 하는 철학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인생의 행과 불행은 오직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암시한 말이라 하겠다. 아무리 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쳐도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의 숙명이라면, 우리는 그 숙명 앞에 기꺼이 순응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시련도 축복’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치병이나 죽음까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면 이미 그 시련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순응하는 자세로 걸으면 기쁘고 즐겁지만, 억지로 몸부림치면서 걸으면 힘들고 지겨운 법이다. 생과 사, 행과 불행이라는 것도 그에 대한 택일적 선택을 고집하기보다 어떤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자세로 임하면 전화위복이라는 역설적인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되면 그 누구의 영전 앞에서도 ‘축 탈속’이라는 인사가 익살로만 그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