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말기를 붙여놓고

 

                                                                                     최병호

내 차에도 마침내 안전운전 단말기를 붙이게 되었다. 편리하기도 하고 심심찮기도 하고 미덥기도 하고, 신비롭기 이를 데 없다. 시동키를 돌리면 ‘안녕하세요. 안전운전의 도우미 로드메이트 플러스(road mate plus)와 목적지까지 즐거운 운전하십시오!’ 예쁜 목소리의 인사가 낭랑하다. 여러 모로 자상한 로드메이트다.

안내의 변(辯)은 ‘약 몇 미터 전방에’ 하는 식으로 도로 상황을 약술하고, 몇 킬로미터 이하로 서행하십시오’ 하는 패턴이다. 앞 얘긴 접어두고 뒤의 서행속도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었다. 종전처럼 단속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전방을 주시하고 수시로 속도계도 살펴야 하는 번잡이 없어져 우선 편했다.

오디오를 끄고 쾌주하다 보면 엔진 도는 소리, 바퀴 도는 소리, 공기 갈리는 소리가 절간처럼 조용히 묻혀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느닷없이 ‘전방에 급커브가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는 메조소프라노의 음색은 나도 모르게 파적(破寂)의 미소를 짓게 한다. 미더움이 한결 더해지고 신비감이 깊어진다.

교통법규 준수를 아예 몸에 배게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공공질서 같은 그런 거창한 의식 때문이 아니라 범칙했을 때 단속 경찰관이나 시청 직원에게 뭐라 얼굴을 들고 변명할 비위가 없어서다. 그동안 속도위반으로, 주차위반으로 쪽지도 몇 장 받아본 바 있다. 속도위반 한 건을 제외하곤 범칙금 헌납은 기민하게 시행했다. 행여 남이 알게 되면 큰일이라도 날까 봐 그때 그때 때를 놓치지 않았다. 속도위반 한 건은 좀 억울해서 상당 기간을 버텨보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공연한, 참으로 공연한 언짢음의 연장일 뿐이었다. 로드메이트는 나의 이런 번잡을 최소화 해주는 말 그대로 좋은 ‘길벗’이다.

교외(郊外)의 드라이브는 대체로 싱그럽다. 시선을 멀리 두고 액셀러레이터를 메조소프라노의 음색에 맞춰 피아노 페달 밟듯 조율하면 내가 길을 내닫는 것이 아니라 길이 전경(前景)을 대동하고 나에게 쫓아왔다. 서로 마주보고 내닫고 쫓아오지만 그것은 부딪칠 줄 모르는 하나! 쾌조의 하모니였다. 이때 로드메이트는 재기 발랄한 딸아이와 같았다.

도심으로 찾아드는 길은 대체로 번잡하다. 막힌 장사진에 눈길은 저절로 앞과 옆과 뒤를 맴돌게 된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빈번히 오가는 발길은 소프라노로 변한 음색에 맞춰 강약이 분분했다. ‘전용차선 준수 구간’이니 ‘교통신호 준수 구간’이니 ‘인터체인지’니 하는 따위, ‘경고’가 불길처럼 높아졌다. 나도 모르게 “거참, 잔소리 되게 하네!” 제풀에 터진 웃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 로드메이트는 바쁠 때 잔소리깨나 해대는 그 누구와 흡사했다.

“약 500미터 전방에 과속기가 붙어 있습니다. 80킬로미터 이하로 서행하십시오!”

어느 날, 통째로 귓속을 파고든 로드메이트의 안내 사(案內辭)다. 저런 광고문도 있나. 과속기가 붙어 있다니? 구시렁대는 내 말에 불쑥 끼어든 아내의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엉뚱하게 무슨 ‘과속기가 붙어 있습니다’냐며, 찬찬히 들어보란다. ‘약 500미터 전방에 과속 위험지역입니다. 80킬로미터 이하로 서행하십시오’가 바로 그 내용이라는 것이다. 아연해질 수밖에. 나는 듣기공부 하는 착실한 초등학생이 되어보았지만, 그 소리는 ‘확실히’ 그 소리였다. 괜히 속이 틀려 아내에게 언제부터 우리가 ‘전방에 과속 위험지역입니다’ 하는 식으로 말을 해왔느냐고 날을 세웠다. 새삼스레 들리는 것이 모두 다 같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었다.

아내의 듣기도 한물 간 것임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나중 이를 확인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광고문 앞부분의 상황 설명이 모두 ‘전방에 ~이다’라는 패턴 속에 넣어져 있다. 이른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이용한 안전운전 단말기의 안내 말씀이 그렇게 될 수도 있을까, 꺄우뚱해졌다. 학동 시절, 나는 말하기, 듣기, 쓰기를 다 바르게 익히도록 배웠다.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본다면 이런 일들이 다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일면 같기도 해서 야릇한 주눅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순(耳順)이란 말이 있었던가. 생각하는 것이 완숙경(完熟境)에 들어 무슨 말을 들어도 이해가 빠르고, 넓고, 깊음을 이름일 것이다. 나이테를 빗댄다면 아득한 세월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나는 들리는 것만 듣고 보이는 것만 보면서 고개 끄덕이며 살고자 다짐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순(耳順)이 반드시 이순(理順)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또한 다짐같이 되지 않는다. 이순(耳順)대로라면 뜻을 이해했으면 고개를 끄덕거려야지 ‘전방에 ~이다’ 따위의 이순(理順)에 마음이 걸려서야 할 일인가.

사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이순(耳順)적인 삶도 알게 모르게 누려오고 있는 셈이다. 약방에 가서 ‘배 아픈 약’을 달라면 약사는 배 아플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배 나을 약’을 준다. 집에서도 흔히 ‘문 닫고 들어오라’고 하면 문을 닫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열고 들어간 다음 닫는다. 이순(理順)에 어긋난 말들이지만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무 일 없이 잘들 소통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인 따스함이 아닐 수 없다.

컴퓨터 단말기에 예속된 나날들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실상이 아닌가 한다. 승용차에 단말기를 붙여놓고 보니 자칭 로드메이트라는 메조소프라노의 고운 음색에 나는 반사적으로 춤을 추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 빛깔이 반드시 바르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 일말의 서글픔을 곱씹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