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개

 

                                                                            홍도숙

안개도 아니고 비도 아닌, 민들레 씨앗같이 가볍고 포근한 것이 자꾸만 내려앉고 있었다. 는개가 피부에 닿는 감촉의 감미로움은 성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미세한 성적 쾌감을 준다고 누가 말했던가. 손등에 얼굴에 사운사운 스며드는 촉감. 어머니 양수 속에 잠긴 태중의 아늑함이 이런 것일까.

강원도 내륙의 고원지대는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 그리고 초겨울에도 간혹 귀한 손님처럼 는개가 찾아왔다. 진펄 위에 끼인 진한 무우(霧雨) 속에서 어미를 찾는 어린 물까치가 삐우삐우 울면, 갈대 숲의 개개비도 지척에 둔 제 집을 못 찾아 눈을 부비며 덩달아 울었다.

는개는 어디쯤에서 시작된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고, 거대한 구름덩어리 안에 갇혀서 눈을 뜨고 있어도 하얗게 다가오는 벽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는개 오는 날이 좋았다.

새벽녘 어머니가 마루 문을 열면 뽀얀 구름무더기가 쓱쓱 방안까지 들어와서 미사포같이 화사하게 쓰러지곤 했다. 솜사탕 속에 들어간 요정처럼 나는 두텁고 하얀 벽 속에 갇히는 것이 좋아서 날이 개이지 말기를, 오랫동안 안개가 떠나지 않기를 바랬다.

남도에서 갓 올라온 초새는 연일 끼어대는 비안개가 싫었다.

“미친눔의 는개! 며칠째여 젠장 맞을 거.”

날 샌 올빼미처럼 푸석한 얼굴로 뽀얀 구름 속을 뚫고 나가며 아무데나 대고 투덜거렸다. 그는 심사가 가뭄철 수숫잎 꼬이듯 해서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다.

바람 따라 재를 넘고 물을 건너 찾아든 이 두메는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일제의 수탈로 더는 견뎌내지 못해 이농 대열에 끼어 무작정 고향을 벗어나긴 했지만 더 멀리 갈 수가 없어 주저앉은 곳이 이 산골짝이었다. 그는 언제라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만 했다. 모두들 남부여대해서 떠나는 북간도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내 고장에 남고 싶었다.

가끔 찾아드는 짙은 안개는 현실과 자신 사이에 아득한 거리를 만들어 내어 절망감을 더해 주는 듯했다. 는개에게 미쳤다고 투덜댔지만 미칠 지경인 것은 저 자신이었다. 성깔처럼 뻐드렁하던 그의 삼베옷이 풀기가 녹아 녹녹해졌는데도 나흘 가리 옥수수 밭의 사래 긴 이랑 끝은 농무에 쌓여 보이지 않았다. 앞서 김을 매 나가던 사람들의 뒤꽁무니마저 오미자 국에 넣은 닭의 알처럼 행적이 묘연했다.

초새는 옷이 젖는 것이 싫고 후텁지근한 습기도 싫은데다, 해가 떠오르면 는개에 젖은 옷이 마를 새 없이 땀으로 소금절이가 되는 것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안개 뒤의 햇빛은 불에 달군 쇠스랑처럼 뜨겁게 내리 꽂히곤 했다.

고원의 계절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성질머릴 부리던 그도 차츰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산간의 기후에 익숙해져 는개가 오는 날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져서 “오늘 날씨 한번 조을랑가비네. 석가터의 감자는 저물기 전에 다 캐야 쓸꺼인디, 싸게싸게 허드라고.” 그는 물풀 사이를 헤엄치는 물방개처럼 설쳐대며 동료들을 재촉했다.

 

강기슭 찻집에서 구수한 커피 향기에 취하여 후적후적 내리는 빗방울을 따라 먼 산허리에 감겨 있는 비안개를 건너다 본다. 까맣게 어두워오는 강 건너 마을엔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는개가 두텁게 끼이면 마을에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나 축제의 서막처럼 밀려와서 잠시 머물다 산산이 흩어지는 는개는 누구라도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장소는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일러주고 총총히 사라진다.

강자락에서부터 부풀어오르는 비안개는 가슴에 차오르는 슬픔이기보다는 두터운 장막 안에서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있는, 어떤 기적을 행하려 하는 아름다운 술사의 몸짓 같다. 견고한 것을 부드럽게 하고 메마른 것을 적시어주며 서로 다름의 대립을 섞이게 하는, 화해의 힘을 일으키는 사랑의 주술이라도 행하려는 것일까.

세상이 황막하고 쓸쓸하니 자연은 사람에게 화해의 선물을 보내오는가. 적막한 들판이 허전할까봐 들꽃을 피우게 하고, 바람을 일으켜 풍경 소리를 내게 하며 잎새를 떨구어 시를 짓는 마음이게 하고, 구름과 별과 눈과 비를 보내어 사람들이 낭만에 젖어 지순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가. 이 계절 외로운 사람들 와서 품으라고 고운 색도 풀어놓고 가는가.

썩어야 비로소 다른 생명으로 물오르게 하는 쌓인 낙엽 위에도 는개가 몇 차례 지나가고 나면 걸은 부엽토 되어 새로 태어나는 거룩한 생명에로 흘러든다.

너는 그냥 스러지는 것이 아니다. 허망하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내일의 생명 안에 스며드는 것이란다. 우리도 흔적 없이 소멸되어 한 점 바람으로밖에는 남지 않는다 해도 어느 골짝에서 태어나는 생명 안에 더러 훈기로라도 남게 되려나.

는개라고 하기엔 아직은 빗줄기가 굵다. 가락이 더욱 섬세해지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 아마 강 건너 마을에 등불이 켜질 때쯤이면 모시잠자리의 날개보다 더 촘촘한, 고운 체에 받힌 떡가루보다 보드라운 는개가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 올 것이다. 너울너울 행복의 강을 건너와서 넓은 유리창에 입 맞추며 오늘 하루는 어떠했냐고 다정히 물을 것이다.

 

 

<책과 인생>으로 등단(2005년).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수상(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