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한다는 것

 

                                                                                  박영란

이중섭의 작품 ‘소’ 앞에 섰다. 소는 9호 정도 되는 액자 집에 살고 있었다. 화면에 꽉 찬 소는 액자를 박차고 나올 듯 앞으로 돌진하는 기세였다. 근육은 성난 파도처럼 꿈틀거리고 눈은 힘으로 응집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거친 느낌도 아니었고 슬픈 표정도 아니었다. 소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동물적인 생동감과 희로애락의 감정이 실린 묘한 전율이 있었다. ‘소’ 앞에서 오래 머물다가 다른 그림에서 다시 ‘소’ 앞에 서곤 했다.

머리로 아는 명작이라는 것이 한순간 가슴을 치는 경험이었다. 마치 소가 뿔을 들이대고 자신에게 돌진하는 그 감동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그림에 떡’일 뿐일지 모른다. 요리책에 나온 요리를 입으로 씹어 보는 것과 그 음식을 눈으로 짐작해 보는 차이로 비유될까.

요리를 먹어본 사람만이 공유하는 진귀한 맛의 느낌이 있듯, 이중섭의 ‘소’를 현실 속의 소값으로 매긴다면 수천 마리 그 이상을 호가하는 상상 속의 소가 되어버린다.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가 9호 정도 액자와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인정되면서 그 무엇에 아무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 예술의 부가가치는 그런 것인지 모른다.

“엄마는 대학교 때 연애 안 해봤어?”

눈치 없는 딸은 식탁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한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이 오고갔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은 실망할 것이고, 한 사람은 안심(?)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제 딸도 컸다고 엄마에게 그런 관심을 보이는데 “없었어. 애” 하고 딱 잘라 말하기에는 너무 썰렁하고, 딸이 갑작스럽게 묻는 의중을 더 이상 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경험을 묻는다는 것은 연애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에 찬 그런 감정일 것이다.

연애에 대한 경험 유무를 떠나 엄마인 내가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학원이나 연애 과외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스스로 찾아가는 탐구영역인지 모른다. 예기치 않았던 이성을 만나 다양한 감정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예기치 않는 일들로 상처받고 절망도 해보는 것, 성장은 그런 환희와 절망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어느 한때 시간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딸에게 꼭 권장사항으로 여길 일도 아니다.

부모란 이렇듯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여행과 사랑이 사람을 풍부하게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 보면 여행을 떠나려는 아이, 사랑에 빠져 있는 아이 그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모른다.

돌아보면 나의 성장은 지나친 간섭에 의해 무엇을 사랑해 볼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실연의 상처도 없었고 무섭게 외로워본 경험도, 무엇에 진지하게 빠져본 적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성향일까도 생각하지만, 요즘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성숙을 이제 와서 후회한다.

산길을 걸으면 많은 들꽃을 만난다. 그 들꽃 이름을 자기 조카 이름 꿰듯 줄줄 알고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꽃을 보고 이름을 듣고 외워야 하는 사람이 있다. 들꽃이 그냥 바람처럼 친구처럼 스쳐가는 느낌과 외우고 기억하고 그렇게 꽃에 다가가는 정서는 다를 것이다.

처음 사람을 만나 얼굴과 이름을 익히는 것과 오랜 시간 그 사람과 감정의 교류를 해 왔던 차이는 영원히 메울 수 없는 한계인지 모른다. 글에서나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풍부한 자연의 정서와 기질을 느낄 때는, 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 대해 이유 없이 서글퍼진다.

경험한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만남이다. 한편의 수필을 쓸 때도 이 내부와 외부와의 절묘한 만남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경험은 기억되고, 지혜가 되기도 하고, 이야기로 남아 무한한 감성과 지성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다는 것은 수확할 것이 없는 빈 들판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람을 허하게 한다.

경험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에세이 문학>으로 등단(2001년). 전북 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2003년).

수필집 『바람이 데려다 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