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초회>

 

자두꽃 필 무렵

 

                                                                                 전용희

활처럼 휘고 덩굴처럼 꼬부라진 산길을 오를 때마다 먼지를 뒤집어쓴 시골 버스는 해소를 앓는 늙은이처럼 그르렁거렸다. 아버지와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린 곳은 강원도 어느 작은 장터 앞이었다. 장터 입구에는 산나물과 약초가 여름 한낮의 뙤약볕에 늘어져 누웠고, 장터 안쪽에서 새끼줄에 매인 염소가 발부리로 흙을 차내며 목줄을 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서먹해 있는 내게, 아버지는 전에도 와 보셨던 듯 개울 너머의 산을 손짓해 보였다.

그 산은 초등학생인 내가 오르기엔 현기증이 날만큼 높고 험해 보였다. 여름방학 동안 여행삼아 오빠 선생님한테 같이 가자던 아버지의 말씀을 쫓아 따라온 것이 은근히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속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온통 불볕더위에 휘감겨버린 산 아래 마을과는 사뭇 달랐다. 하늘에 닿을 듯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맑고 청량한 기운과 그늘 때문인지 별개의 세상인 양 여겨졌다. 화전민들이 한 집 두 집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그 산마을을 반쯤 올라가고 나서야 조그만 분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왜 아저씨 선생님은 이 산속에서 살아?”

아버지는 내 말에, “아저씨가 아니고 오빠라고 해라” 하고 내 말을 잘랐다. 아버지는 차에서도 몇 번씩 그 사람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보다 스무 살도 더 넘게 많은 선생님을 오빠라고 부를 수 없다고 나는 아저씨 선생님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우리를 발견하고 손에 들고 있던 삽을 내려놓고 달려 나오던 아저씨 선생님은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반가워했다. 그는 방학 때면 한 번씩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그가 온 날이면 아버지가 계시는 큰방에선 그의 울먹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고, 그가 돌아간 날의 밤이면 아버지는 지병이라도 도진 양 시름시름 앓았다.

그날도 나는 일찌감치 불을 끄고 창가에 서서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루 건너 큰방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도 잠결에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한, 북쪽에 남기고 온 아버지의 가족과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는 고향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북녘 땅의 가족을 못 잊어 하며 남쪽에서 겉도는 아저씨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의 행간에서 북녘의 고향에 남겨두고 왔다는, 그 또래의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학생 수가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는 분교는 여름장마로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아버지와 그는 기울어진 교사校舍를 고치고, 쓰러져 누운 나무를 일으켜 세우고, 운동장까지 밀려온 돌들을 치웠다. 나도 같이 조그만 돌들을 나르다가 지루해지면 자두나무 아래에서 땅에다 그림을 그렸다 지우고, 글씨를 썼다가 지우면서 혼자 놀았다. 그러면 그는 일하다 말고 자두나무 아래로 걸어와서는 자두를 따서 내 손에 쥐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산속 마을은 산그늘이 어둠과 함께 내려왔고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평상에 아버지와 누워 그 찬란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똥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별빛 아래 홀로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두를 따줄 때의 따스한 눈빛과 쓸쓸한 실루엣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슬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린 계집아이였지만 슬픔은 산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늦은 결혼을 할 때까지도 산속의 분교로만 다녔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들은 말로는 스스로 분교만을 자원했다고 한다. 무엇이 한창 나이의 젊은 남자를 산속 마을에 머물게 했는지, 그때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높은 산들을 몇 개나 넘어야 나온다는 고향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렇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린 나를 남겨둔 채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그를 눈으로 찾는 듯 하다가,

“슬퍼하지 마라, 나는 벌써 고향에 돌아왔단다.”

“첫 각시와 혼례를 올렸던 내 집 마당에, 너의 오빠를 낳아 기르던 그 방에 돌아왔어.”

유언도 없이 이런 말씀만을 중얼거리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 나는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버지를 모셨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속에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외감도 들어 있었다. 그 후로 어머니와 나는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아저씨 선생님도 늦은 결혼 이후로는 산 아래 마을의 학교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더는 만나본 적도 소식이 오간 적도 없었다.

아버지와 그는 서로의 모습에서 남겨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나를 통해 북쪽에 있을 누이동생에게 자두를 따주었는지도 모른다. 마주치고 엇갈리고 다시 마주치는 시선들 사이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수없이 겹쳐졌으리라.

나는 자두꽃이 필 무렵이면,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는 아버지 고향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두를 따서 내 손에 쥐어주던, 아버지 가슴에 멍에처럼 얹혀 있던 그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