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껍질 배

 

                                                                                  유경환

새벽 2시쯤이면 습관적으로 잠이 깬다. 언잖아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의 정적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나이 들어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온전한 정적, 이는 틈 없을 만큼 꽉 째인 침묵의 한 공간이다. 전화벨이 울릴 시간도 아니며, 이웃이 티브이를 켤 시간도 아니다. 그러니 나만의 시간이 담긴 공간인 셈이다.

누운 채 망망대해에 표류하듯 묵상한다. 묵상은, 내가 띄운 작은 배 한 척이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톰한 소나무껍질을 자르고 다듬어 만든 배. 이 배 한 척은, 실존에 대한 절대고독의 비유이기도 하다.

나무껍질 배는 실제로 내가 만들어 띄운 배다. 적당한 두께의 소나무껍질이 있으면 배 만들기는 즐거운 놀이였다. 나의 유년 시절엔 놀이가 별로 없었다. 손 안에 들 만한 크기로 칼을 대었다. 앞쪽은 동글뾰족하게 다듬고, 선미는 몽툭하게 깎았다. 이렇게 배 모양이 되면, 속을 옴폭하도록 파서 보트처럼 아담하게 마무리하였다.

그 시절엔 학교의 시간표에도 공작시간이 있었다. 공작工作. 손을 놀려 무엇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그래서 공작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마음대로 소재를 선택하여 한 시간 내내 골똘히 만드는 창의적 시간. 늘 배를 만들곤 하였다. 태어나 자란 곳의 갯가에서 출렁이던 배를 늘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 행복의 포물선은, 청소년 시절로 접어들면서 이탈된 궤적을 그렸다. 그 뒤로 공작시간에 대한 추억은, 몸서리치는 전율로 바뀌었다. 1950년대 이후 공작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는, 무섭고도 음흉한 정치나 안보 관련 기사에 제목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청소년 시절이 시작될 무렵, 설악산 마등령에서 외설악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선 으레 아주 오래 된 고사목을 만났다. 고난의 형틀처럼 두 팔 벌린 나목들 밑엔, 제법 두께를 지닌 소나무껍질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를 주워와서 어린 시절의 솜씨를 되살려 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살던 원효로 한강변에서 띄웠다.

오랜 항해를 바랬다. 중심을 잡도록 이쑤시개를 돛으로 꽂고, 물에 잠기지 않는 부분엔 담배곽 은박지를 덮어씌워 반짝이게 하였다. ‘잘 가거라, 내 대신 멀리 멀리.’ 혼자 치는 손뼉 소리에 나의 배는 햇살을 끌면서 조용히 떠났다.

이렇게 조촐한 의식으로 청소년기는 물살을 탔다. 누구나 다 겪는 이 시절의 외로움. 이 외로움은, 강물처럼 그리움을 끌어왔다. 이런 심상에서 헤어나려고, 작은 배를 정성껏 만들어 떠내려보낸 것이다.

새벽에 잠을 깨면 내 속의 유년이 덩달아 깨어난다. 나무껍질을 다듬던 아이. 햇살 눈부신 날 부르던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 속의 아이가 웃는다. 맑은 영혼으로 노래하고픈 심사를 잘 아는 그 아이.

그런 아이만이 아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햇살 가려진 날 좋아하던 사람과 말문이 막혀 망막함에 혼자 겨워하던 그런 아이도 고개를 든다. 그토록 힘든 시절도 있었다. 그때엔 야속했지만 지금은 달라서 별로 애태우지 않는다.

나는 또 사람들을 얼마나 미워했던가. 권력이라는 것이 산 같은 파도로 일어나 내 주변을 산산이 부서뜨릴 때, 나의 젊음은 철부지처럼 길길이 뛰고, 그리고 맷돌처럼 나는 얼마나 아프게 갈렸던가.

이런 기억들의 틈새로 작은 나무껍질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소급해 더듬는다. 어디쯤, 어디쯤을 나을나을 흘러가고 있을 것인가 하고 천장 무늬 좌표 위에서 추적하는 것이다.

소나무껍질 배는 코르크만큼 가벼워서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한 척에 나는 아무것도 싣지 않았다. 그 어떤 욕심도. 그러니 가라앉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혹 뒤집히는 경우가 있다 하여도, 결코 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뒤집히면 어떤 물살이든 되집어놓을 것을 기대한다.

그보다는 어떤 틈새에 끼여서 옴싹달싹 못하게 되었거나, 물살이 실어온 쓰레기더미에 걸려 잡혀 있다거나, 또는 눈 먼듯 썩은 지류로 흘러들어 빠져 있다거나 하는, 이런 경우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바로 여기에 내가 묵상하는 까닭이 있다. 절대고독을 통해 드리는 기도는, 계속 항해하여 바다에 이를 것이라는 맹목적 확신을 위한 기도이다. 이젠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내 속에 잠재한 유년의 아이가 맑은 영혼으로 불러주리라는 기대도 맹목적 확신은 품고 있다.

언젠가 경주박물관에서 한쪽 뜨락에 가즈런히 세워놓은 머리 없는 불상들을 본 적이 있다. 불상들 몸짓이 날 잠시 그곳에 잡아두고, 그 자리에 없는 표정을 살피게 하였다.

요즘 나의 새벽 묵상도 고운 노래 부르는 아이, 그 아이의 표정을 찾고 있다. 허무의 끝이 아닌, 조용한 모색이다. 하지만 원래 껍질이란 생生의 본질이 아닌, 그것을 둘러싼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