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승(家乘)

 

                                                                                          김형진

문중 일을 보는 재종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얼마 전 문중 회의에서 가승보(家乘譜)를 편찬하기로 결의하였기에 수단(收單)도 뜰 겸 오늘 찾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버님 여의고 홀로 고향집을 지키시는 어머님을 어렵사리 설득하여 내가 사는 이곳으로 옮겨 사시게 한 지 이십 년이 다 되도록 문중 일 외에는 안부전화 한 통 변변히 하지 않던 분이었다. 재작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을 적에도 그럴싸한 핑계 전화와 조위금 송금으로 예의를 다하던 분이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찾아오겠단다.

고향에서 살 적에는 명절마다 당숙들의 방문을 받곤 했었다. 명절이면, 아버님께서 2대 독자이신데다가 우리 집이 집성촌에서 이십 리쯤 거리한 곳에 떨어져 있는 터라 아버님과 나 두 사람이 쓸쓸하게 차례를 지내야 했었다. 예법대로라면 4대 종손 집이니 당숙들이랑 6촌들이 다 모여 차례를 지내야 옳은 일인데도 당숙들은 어찌된 일인지 점심때가 지나서야 거나하게 취해 큰집엘 찾아오곤 했다. 당숙들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나는 한바탕씩 고통스러운 의례를 치러야 했다. 우선 아버님의 부름을 받아 당숙들에게 큰절을 드린 뒤 무릎을 꿇고 앉으면 좌상인 옹암당숙께서는 실눈으로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뜯어보다가 무겁게 입을 여셨다.

“너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단천도호부사(行端川都護府使) 집안 5대 종손이니라. 멀리 위로는 신라왕 경순왕의 혈통이며, 파시조(派始祖)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의 20세손이니 시방 니 핏줄기에는 명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왕대 밭에서 왕대가 난다고 했으니, 항용 행동거지에 천박함이 없이 하고 심성을 올곧게 하며 학문에 정진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근엄하고 묵직한 옹암당숙의 음성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동안 중리당숙과 선양당숙께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고 아버님께선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내 표정을 살피셨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주안상이 들면 주전자를 내 손에 쥐어주시며, “당숙들 첫 잔은 니가 채워드려야 한다” 명령하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나면 당숙들의 입에서는 명문의 증거인 선대의 벼슬 자랑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오곤 했다.

초등학교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가문 자랑에 중학생이 된 뒤에는 차츰 싫증이 나더니 고등학생 적부터는 반발심이 돋기 시작했다. 책 한 권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오늘의 처지에 과거의 명문이 무슨 소용이며, 더군다나 계급사회가 자취를 감춘 이 시대에 족보에 나열된 선대의 벼슬이나 들먹이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패배주의자의 현실 도피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명절마다 펼치는 당숙들의 가문 자랑이 내 어깨에 짐을 지우기 위한 행사라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가슴에 바윗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답답함을 감당하기 힘겨웠다.

내가 대학 이 학년 적 설날이었다. 역시 점심 뒤에야 당숙들과 육촌들이 몰려들었다. 술이 몇 순배 돈 뒤, 이번에는 족보궤에서 5대조의 홍패(紅牌)까지 꺼내놓고 명문의 후예로서의 영광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집안이 어째서 이렇게 망했답니까?”

내 엉뚱한 질문은 막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방안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방안에 찬 기운이 확 돌더니 당숙들의 싸늘한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을 감당하기 버거워 밀치고 일어서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 즈음이었다.

“그게 다 시국 탓이지야.”

옹암당숙께서 싸늘한 한 마디를 남기고 두루마리에 바람 소리를 내며 일어서시자 선양당숙과 중리당숙께서도 끌끌 혀를 차며 따라 일어서셨다. 아버지께선 근심 어린 눈길로 나를 힐책하시곤 이미 토방에 내려서신 당숙들을 붙잡으러 나가셨으나 옹암당숙의 내친걸음을 막지 못했다. 나는 어른들이 대문 밖으로 나가신 것을 확인하고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은 영어(囹圄)에서 풀린 듯 가뿐했으나 가슴은 거무죽죽한 앙금 같은 것이 가라앉아 있는 듯 개운치 않았다. 느릿느릿 내 방에 들어가 벌렁 드러누웠다. 누렇게 얼룩진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무늬뿐인 양반 위세로 근동에서 이름난 부호와 혼인은 하였으나 끼니 갈망이 어려워 처가 동네에 이주한 뒤, 주위 사람들 눈총 받아내랴, 뼈에 박히지 않은 농사일 거들랴 고달프고 서러운 세월을 이겨내신 아버님께 선대가 누린 영화가 왕이면 무엇하며 정승판사면 어디에 쓸 것인가. 살점은 다 뜯어먹고 처치 곤란한 뼈다귀만 남겨놓은 조상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그 뼈다귀를 별난 가보인 듯 치켜들고 흔들어대며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집안어른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방문 열리는 소리에 무심결에 돌아보니 주름 깊은 아버님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 아버님을 맞았다.

“니 맘은 내가 안다마는 집안 어른들 앞으서 그리 무례허먼 쓰것냐. 쪽빡을 채워주었어도 조상은 조상인 것인디.”

“……….”

“어찌꺼나 가문이 무너지먼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 후손이 히야 헐 일이니께.”

진지한 아버님의 음성이 다시 가슴을 눌러왔다.

“저는 선조가 누리던 영화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이 저지른 죄과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 당돌한 언사에 망연해 있던 아버님께서 들릴락말락 한숨 한 가락을 내쉬시고는,

“선대가 저지른 잘못을 갚음서 사는 것도 후대가 히야 헐 일이지야.”

아버님은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게 사셨다.

내가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다. 나를 불러앉히신 아버지께서는 작심을 하신 듯 무겁게 입을 여셨다.

내 5대조께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자, 향촌에서 그 후손들이 누린 세도는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단다. 4대조 때에는 부리던 노비가 열이 넘었으며, 곳간에 볏섬이 넘쳐 노적을 할 정도였다. 4대조께서는 말을 타고 근동 순시하기를 즐겨하셨는데 말 탄 분을 길에서 만난 상민들은 길가에 부복하여 사지를 부들부들 떨기 일쑤였다. 아버님은 이 대목에서 말을 멈추고 몇 차례나 한숨을 쉬셨다.

“너도 인자는 철이 들 만큼은 든 나인게…….”

못을 박아 놓으시곤 무겁게 다시 입을 여셨다. 부와 권세가 넘치면 사념(邪念)이 발동하는 게 인지상정일까. 4대조의 인륜을 벗어난 행태는 극에 달해, 근동에 사는 어린애 딸린 상민 아낙을 강제로 끌어다가 첩으로 들어앉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도 어머니의 품이 그리운 아이들은 해질녘이면 날마다 집 뒤 선산 마루에 와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4대조께선 저것들이 기분을 상하게 한다며, 노비들을 시켜 몰아내곤 했다.

“그런디 말이다, 업보라는 게 꼭 있는 것이어야.”

내 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 대에는 허울만 권세 좋은 양반 집안이지 실속은 거지반 비어 있었다. 전답이 날로 줄어들어 노적은커녕 곳간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길을 나설 때면 받았던 근동 상민들의 부복도 흐지부지 사라져갔다. 얼마지 않아서는 동학 농민봉기가 터졌다.

이웃 고장인 고부에서 출발한 한 떼의 동학군이 눈에 살기를 띠고 집안으로 몰려들어 다짜고짜 할아버지를 끌어내었다. 끌어내어 4대조 비석에 단단히 묶어 놓고는 지휘자인 듯한 젊은이가, 너의 할애비가 지은 죄 값을 받으러 왔다고 소리치자 삼면에서 몽둥이가 쏟아졌다. 눈만 뜨면 훤히 보이는 산 아래 집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나 혼비백산하신 할아버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군내에서 힘께나 쓰는 사람으로 알려진 동생, 그러니까 내게는 종조부되시는 분께서 달려와, 형님 대신 나를 죽여라 소리지르며 막아서는 통에 할아버지는 겨우 목숨을 건지셨단다.

“그때 동학군을 지휘하던 젊은이는 어미를 뺏기고 집 뒤 선산 마루서 울던 그 애기의 아들이었단다. 그러니께 업보라는 것은 꼭 있어야. 당대가 아니면 후대에라도 꼭 있는 것이어야.”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다짐을 주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다.

죽을 고비를 모면하신 할아버지는 반은 넋이 나간 사람이었다. 앓아 누운 지 달포 만에 몸을 추스르고 나서는 얼마 남지 않은 전답을 서둘러 팔기 시작하셨다. 전답을 팔아 모은 돈으로 선산 뒤 험한 고갯길을 닦았다. 그러고 남은 돈으론 사람들을 시켜 남바위를 사들였다. 때가 마침 초겨울이라 길가에 쌓아놓고, 겨울이 다갈 때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소위 속죄 행위를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 빈 양반 가문은 그야말로 바닥을 보고 말았다.

“도드라진 때가 있으먼 꺼지는 때도 있는 것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이어야. 헛눈 팔지 말고 속죄허는 맘 지켜가다 보먼 어느 날엔가는 다시 도드라질 날이 올지 누가 아냐.”

할아버지께서 몰매와 적선으로 속죄를 했다면, 아버지께서는 남을 해치는 일은 물론이고 남 싫어하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는 생활로 선대의 업보를 씻으려 하셨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 이르는 이대에 걸친 속죄가 하늘에 닿아 내가 이나마 사람 사는 모양새는 갖추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중 일을 보는 육촌 형님이 여느 때처럼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방문까지 하겠다는 것은 십중팔구 가승보를 편찬하는 가문의 대사업에 장애가 될 성싶은 훼방꾼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일 거라는 생각이 일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들이닥칠는지 모르는 수단유사(收單有司)를 어떻게 대접해 보내야 할지……?

“쪽박을 채워주었어도 조상은 조상인 것인디.”

궁리하는 내 귀청에서 아버님의 근심 어린 음성이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