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지

 

                                                                               강숙련

할 수만 있다면 귓속에서 뱅뱅 맴도는 말들을 꺼내고 싶다. 까맣고 단단한 것들, 더러는 아직 여물지 못해 파삭파삭한 것들. 마음에 담기지 못한 말들이 귀지가 되어 고시랑거리는 모양이다. 꼼지락꼼지락, 옴죽옴죽 되살아나는 근지러움. 참을 수 없는 이 불편함.

돌 깎는 공장에 가면 돌가루가 날리고 말(言) 깎는 공장에 가면 말(言)가루가 날린다. 광부들은 폐에 쌓인 돌가루 때문에 직업병을 앓는다. 그들의 진폐증(塵肺症)은 1급 재해다. 사람들의 말(言)가루는 딱지처럼 귀에서 엉긴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면서도 어느 새 귀지는 진폐처럼 쌓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거린다.

귀지만으로도 인류의 혈통이나 이동경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서양인의 귀지는 지루성이고 동양인의 귀지는 건성이다. 한국인의 귀지가 대개 마른 것인 반면에 일본인의 귀지는 지루성과 건성이 섞여 있어 아프리카계와 몽골인의 혼혈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내 귀에서 고시랑거리는 귀지는 몽골계도 아프리카계도 아닌 말 공장의 분진임에 틀림없으려니 혈통과는 상관이 없다. 굳이 분류한다면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귓속에 담아둔 밴댕이 소갈딱지와 사촌쯤 될 것이다.

조심성 없는 말일수록 비릿한 생짜배기 날(生)것 상태로 상대의 가슴에 꽂힌다. 그때에도 귀는 걸러 듣는 안전장치로서의 할 일을 다해야 하며 옹졸한 사람일수록 더욱 자주 귀를 후벼야 한다. 귀지는 귓구멍 섬모의 자정작용으로 털려나오는 것, 즉 피부의 각질이 분비물에 닦여 나오는 것이다.

흔히들 ‘삭여 들어라’고 한다.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라는 말이다. 삭여 듣지 못해 눌어붙은 말 부스러기가 각질이 되었을 터인즉 소가지 나쁜 사람의 경우 좀더 자주 귀를 후벼야 하나 보다.

나는 한쪽의 청력이 조금 약하다. 너무 자주 귀를 후벼서 귀앓이를 심하게 한 후유증이다. 진작 소가지를 잘 다스렸더라면 청력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까. 하지만 그런 후회에도 불구하고 면봉과 귀이개를 달고 산다. 결국 사용주를 잘못 만난 귀가 파업을 하려 들고, 이비인후과의 의사는 함부로 귀를 후비지 말 것을 처방함으로 노사간의 중재에 나선다.

팔순의 시어머님은 노인성 난청이다. 그분과의 전화통화는 늘 동문서답이다.

“어무이, 저녁 드셨어요?”

“그래, 보일러 잘 돌아간다.”

“몸은 좀 어떠셔요?”

“하모! 별고 없다. 방도 뜨시다. 내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경우는 기껏 보청기를 권하는 수밖에 의사도 별무처방이다. 하何기막힌 세월 탓으로 속수무책 귀를 닫으신 당신 앞에서 자식은 늘 민망하다. 하지만 나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귀 막힌 세월을 위로한 적 있었던가.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내 무릎에 당신 머리를 뉘고 귀 한 번 시원히 파드린 적 있었던가. 행여 나의 조심성 없는 말 폭탄에 고막이나 상하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옛날 중국 요나라의 허유는 은자(隱者)를 자처하며 살던 중, 천하(天下)나 구주(九州)를 맡아달라는 임금의 청을 듣자 영천 맑은 물에 귀를 씻고 산으로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은자가 할 일이 아니었던가 보다. 차라리 귀를 씻음으로 자신을 지켰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도 할 일은 아니다. 허유의 귀 씻은 물이 더럽다 하여 자신의 말에게도 먹이지 않았던 소부의 일갈 앞에서 고개가 숙여진다. 스스로 은자(隱者)임을 드러내어 은근히 명성을 얻고, 임금으로부터 정권이양의 제안을 받았다면 이미 진정한 은자가 아니라고 소부가 타이른다. 숨어 사는 은자란 자신이 은자임을 자처하지도 않으며, 혹여 그러지 못해 귀 씻을 일이 생겼다면 그 물은 더욱 더럽다는 말이다.

이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생겼다. 말 공장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귀만 더러워졌노라고 투덜거릴 수도 없게 되었다. 허유나 소부를 흉내 낼 위인도 못되는 주제에 하릴없이 귀지를 후벼 파다가 병원신세나 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시어머님처럼 동문서답이나 할까보다.

 

 

문화일보로 등단.(95년)

수필집『얼추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