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박영덕

톨게이트에 가까워지자 진종일 꺼두었던 길잡이를 비로소 켠다. “안녕하십니까, 안전운전 도우미입니다.” 종달새같이 낭랑한 음성이 차 안의 정적을 깨트린다. 그것이 신호인 양 핸드폰을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Y. 아파트 공동 소독을 하는 날이어서 앞집에 부탁을 하여 두었다더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긴 일정이든 짧은 일정이든 여행의 끝은 늘 이렇다. 길잡이의 안내까지도 사양하며 “잊자, 버리자, 떠나자”라고 호기롭게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집이 가까워져 오자 창밖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들이 된다. 일상으로의 회귀, 겨우 하룻길이었는데도 비워두었던 자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어느 새 끼어든 모양이다.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듯 말수가 줄어든다.

이게 바로 여행 후의 우울증이라 하는 것인가. 핸들을 잡은 나 역시도 풍광에 취하여 한담을 즐기던 여행지에서의 내가 아니다. 이래서였던 모양이다. 차에 길잡이를 달아주며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길눈 하나는 밝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니 필요 없다는 내게, 빙긋 웃으며 “집 잘 찾아오라고 달아주는 거야” 했다. 우리 집이라고만 써 넣으면 집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준단다. 설마 내 집에 드는 길을 모를까봐 하며 눈을 흘겨주었지만 어쩌면 이런 마음의 순간순간들을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벗들을 내려주고 단말기를 내 집으로 맞춘다. 반대편 차선에는 어슬어슬 내려앉는 땅거미 위로 시가지를 벗어나려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다. 상·하행선 모두가 심한 정체다. 지금 집을 벗어나면 언제 돌아오려고 저러는가. 어쩌면 떠남과 돌아옴이란 서로 꼬리를 무는 순환의 고리인지 모른다. 집을 떠날 때 마음은 줄 끊긴 연처럼 하냥 날아가고 싶다가도 해가 설핏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은 어느 새 귀로에 서 있다. 퇴근 시간의 인도도 사람들로 복작댄다. 그 흐름 속의 한 존재인 나를 생각한다. 치열함과 숙연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건널목에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에 피로감이 배어 있다. 뒷모습은 더욱 그렇다. 삶의 피로에 짓눌린 뒷모습은 누구나 애처롭고 초라하다. ‘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육교 난간엔 걸린 아파트 분양 광고 펼침막이 바람을 타고 있다. 집이 무엇이던가.

솔제니친의 소품 중에 ‘모닥불과 개미’란 글이 있다. 작가가 썩은 나무 한 토막을 불 속에 던지자 그 속에서 많은 개미들이 타죽지 않으려고 밖으로 튀어나와 헤맨다. 그것을 본 작가는 개미들의 모습이 불쌍해서 그 나무토막을 불더미 속에서 꺼내 불 밖으로 굴려주는데, 놀랍게도 살아나게 된 개미들이 다시 제 살던 나무 속의 집을 찾아 들어가다가 타죽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여기서 ‘알 수 없는 힘’이 그 방황하는 개미들을 버림받은 집으로, 불타는 집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집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집이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곳만은 아니다. 지친 나그네나 집이 없는 사람들이 건너다보는 그 불빛처럼 다정하고 아늑한 곳만은 아니다. 육신의 보호와 따뜻한 사랑과 안락에의 갈구와 기대로 일군 집이 오로지 평화의 장소이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그곳엔 가족이 있다. 핏줄이 있고 평생의 약속이 있으며 오랜 세월 손때 묻은 세간들이 있는 곳이다. 며칠 전, 이삿짐이 다 나간 동생 집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근 십여 년을 제 집같이 드나들었던 집인데 세간을 다 들어낸 빈집은 생소하기가 그지없었다. 언젠가 시골에서 본 폐가의 정경.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고 꺼져 앉은 고래 위로 잡풀이 무성하며 깨진 그릇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한때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깃들었던 생의 순간순간들이 묵묵히 삭아가는 집을 보는 그 마음이란 무서움보다는 서글프고 비감스러웠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백 년을 버티지만 사람의 훈기가 없는 집은 몇 달도 못 버틴다고 한다. 사람은 집에 깃들이고 집은 사람에 깃들이는 것일까.

우리가 돌아가는 곳, 집이란 닻이자 덫이다. 안주하려는 욕망과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이 팽팽히 길항하는 곳이다. 사진이나 그림에는 유난히 ‘귀로’라는 제목의 작품이 많다. 나는 그런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허약하고 불안하며 위안과 안식처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인간은 원래 흩어지려는 습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제도가 생겨났고 집이란 안식처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세계인의 애창곡 ‘홈 스위트 홈’의 작곡가도 일생을 떠돌며 길 위에서 세상을 마감했다지 않은가. 이 아이러니한 작가는 집을 지녀 본 적이 없기에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간절한 곡을 지을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좀처럼 풀리지 않는 큰 길을 피해 샛길로 접어드는데 안전운전 도우미가 “목적지를 벗어났습니다. 300미터 전방에서 유턴 하세요” 충고를 한다. 핸들을 쥔 손에 갑자기 땀이 난다. 그랬다. 집은 내게 목적지였다. 구사일생 살아날 기회를 버리고 불에 든 화택이어도 다시 드는 개미처럼 ‘알 수 없는 힘’을 지닌 곳이다. 해서 집은 등 뒤에 쳐놓은 배수진이고 적진에서의 퇴로이며 나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다. 결국 집은 내게 인생이며 삶이었다. 안에서 이는 바람이 바깥세상의 바람보다 더 거세겠는가. 그러고 보면 길잡이를 달아 준 그도 겨운 나의 집살이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더니 안쓰러운 마음 한 자락쯤은 담아두고 살고 있었나 보다. 길잡이를 다시 집으로 맞춘다. 또박또박 정성스레 ‘우리 집’이라고 쓴다. 물이 강으로 흘러들고 씨앗이 흙으로 돌아가듯, 해가 저물면 사람도 자기의 은거지로 깃드는 것인가.

 

 

<월간 문학>으로 등단.(92년) 현대그룹 문학상 수상.(94년)

대한문학상 수상.(2006년) 남도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현 대표에세이 회장.

저서 『달개비 꽃에는 상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