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것을 위하여

 

                                                                                    신현복

- 봄 -

 

밤새 내린 봄비에 꽃잎들이 흩어진다.

겨우내 맹추위를 견딘 후 이제 겨우 움이 트고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세우(細雨)에도 여린 몸을 못 가누며 힘들어하고 있다. 잎도 없는 마른 가지에 조화처럼 처연하게 달려 있던 보라색 진달래와 가느다란 가지마다 뽀얗게 꽃을 피워내던 앵두나무, 고고하게 오만한 봉오리를 터뜨리던 목련 꽃잎이 빗물에서 부유하고 있다. 질척이는 땅 위에 떨어진 꽃잎들의 색깔이 선명해서 더욱 안타깝다. 겨우내 기다려온 봄이 오는가 했는데 밤새 내린 비와 소매 속을 파고드는 한바탕 꽃샘바람에 어느덧 이렇게 봄이 이울고 있는 것이다.

지난 봄, 담장과 대문을 온통 둘러싸며 탐스럽게 피어나는 빨간 줄장미를 뒤로 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한창 물이 오른 싱싱한 잎새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담장 그득 피어나는 빨간 장미는 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는데, 여행 일정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실컷 만끽하지 못하고 집을 떠나는 내 마음은 못내 아쉬웠다. 여행 중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과 북유럽의 길고 긴 빙하의 계곡을 지나오면서도 문득 서울 집에 만발했을 빨간 줄장미를 그려보곤 했었다. 그리고 십여 일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그 허망함이란……. 담장 밑에 수북이 쌓여 있는 붉은 꽃잎들이 벌써 봄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몇 번의 봄비와 바람과 더불어 계절은 꽃잎만 수북이 남긴 채 또 그렇게 흘러가버린 것이다. 담장 밑에 수북이 쌓인 꽃잎들을 쓸어 버리기에는 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얼마 동안은 그냥 두기로 했다. 피어 있을 때 못지않게 향기도 나는 것 같고 꽃잎을 사뿐히 밟으며 오가는 동안은 내 곁에 봄이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 가을 -

 

가을이 깊어가면서 뒤뜰의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밤새 부는 비바람에 집 옆 도로는 떨어진 노란 은행잎으로 온통 뒤덮여 있다. 낙엽이 흠뻑 젖어 있어서 경사진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 길 한쪽으로 쓸어 놓았는데, 며칠 뒤 나가 보니 가을볕에 어느 새 바싹 마른 은행잎이 도로 위를 온통 뒤덮고 있다. 한바탕 부는 바람에 달려 있던 잎마저 곤두박질치고 낙엽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데 내 마음에서는 우수수 소리를 내며 또 한 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올 가을엔 유난히 바람이 잦고 낙엽이 빨리 지고 있어서 가을이 후딱 지나갈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오후 무렵, 누군가 열심히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윗집에 사는 어느 노인분이 커다란 싸리비로 낙엽을 쓸어내고 있다. 은행잎뿐 아니라 모든 나뭇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플라스틱 빗자루로 쓸어 내기에는 역부족이기도 했지만 쌓인 낙엽을 보면서 가을을 곁에 두고 싶었는데…….

따끈한 유자차를 만들어서 그 노인에게 대접하며 우리 집 은행나무 때문에 길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뜻밖에 그는, 가을마다 이런 아름다운 은행잎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한다. 할 일 없는 노인이 운동삼아 하는 것이니 낙엽 치우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바람에 시달린 누런 은행잎을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담는데, 마른 나무에 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또 한 번 쏟아진다. 가을을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는 것 같아 아쉬워했는데, 아직도 가을이 남아 있음에 안도한다. 어느 집 정원에선가 만추晩秋의 낙엽 태우는 냄새……. 시나브로 싸늘한 공기가 이제 그만 가을을 놓아주라고 재촉한다.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그냥 놔두라고.

 

- 흘러가는 모든 것 -

 

삼 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가족 모두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이 년 정도가 지난 언제부턴가는 우리 곁을 떠난 어머니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한식날 어머니 산소에 갔을 때는 담담하게 “엄마, 우리 왔어요” 하면서 산소의 잡초를 뽑을 수 있었고, 아버지도 이제는 우시지 않는 것 같았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그 동안 어머니께서 아픈 몸을 움직이며 나름대로 정리를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 년 동안 치료를 받는 동안 담당의사도 우리 가족도 어머니의 몹쓸 병에 대해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우리 가족이 어머니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당신께서도 스스로 떠날 준비를 해 오신 것이다. 그 즈음 어머니 마음이 어떠 했을까를 지금도 가끔 헤아려본다.

요즈음 아버지께서는 집안 정리를 하고 계신다. 칠남매를 키워낸 흔적이 집안 곳곳에 남아 있을 터인데, 그것들을 다 찾아서 우리에게 다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지난번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성적표며 상장들을 일곱 개의 봉투에 담아서 우리에게 주시더니 이번 한식 때는 사진이 그득 담긴 누런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주셨다. 나의 이름이 정갈하게 쓰인 누런 봉투에는 나의 돌 사진과 여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 대학 졸업과 결혼 사진을 비롯해 두 아이들의 어렸을 때의 사진들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부모님의 젊었을 때의 모습과 함께…….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일곱 남매가 담긴 수많은 앨범들의 사진을 정리하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린 것들 올망졸망 세워놓고 사진 찍으시던 줄장미 곱게 피던 봄날을 생각하셨을까. 어머니 처녀 때의 예쁜 모습을 처음 보았을 가슴 설레던 젊은 날을 추억하셨을까. 흘러간 모든 것을 돌아보며 사진 찍기를 좋아하시던 딸 부잣집 아버지는 이렇게,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고 계신 것이다.

흘러가는 것이 어찌 세월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