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 수필가의 남기고픈 이야기①]

 

외도(外道)의 시말(始末)

 

Ⅰ. 철학적 수상과 문학적 수필

 

                                                                                   김태길

1. 철학적 수상

청소년기를 일제 강점하에서 보낸 나는, 5년제 중학교를 청주에서 마친 다음에 일본에 있던 3년제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의 일본 고등학교는 일본 본토에 있던 다섯 개의 제국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예과(豫科)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주로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그 교양과목 가운데서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된 것은 철학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나는 그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에서 만난 상급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학교의 강의는 듣지 않아도 무방하나 철학에 관한 독서는 게을리하지 말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기숙사 상급생들의 권고를 따라서 철학자들의 대표적 저서를 이것저것 읽어보았다. 일본 철학자들의 저서도 읽어보았고, 서양 철학자들의 저서를 번역으로 읽어보기도 하였다. 상급생들이 들고 다니는 철학서 가운데는 초보자를 위한 입문서는 보이지 않았던 까닭에 나도 따라서 본격적인 철학서를 읽었던 것인데, 그 뜻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상급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책들 가운데는 철학자들이 쓴 수상집(隨想集)도 있었기에 나도 따라서 그것들을 읽어보았다. 예컨대 베이컨의 『에세이』 또는 아베 지로(阿部次郞)의 『삼태랑(三太郞)의 일기』 따위를 읽었던 것인데, 이번에는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감동을 느끼게 하는 대목도 자주 있었다. 나도 가능하다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1945년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 것을 계기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정했을 때, 나도 철학적 수상을 쓰고 싶었던 저 욕심이 발동한 것은 물론 아니다. 전혀 다른 동기로 인해서 그렇게 정했던 것인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난해한 언어를 쓰지 않고 철학적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철학도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철학 사상이라면 되도록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 사상’이니 ‘철학 사상’이니 하는 모호한 말을 썼다.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준비를 위하여, 우선 저 두 낱말의 뜻을 밝혀두고자 한다. 형이상학, 인식론 또는 윤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되 그 주장을 논증하기 위한 논리적 시도가 뒤따를 경우에는 그것을 ‘철학 사상’이라 부르고, 그 논리적 시도는 없이 그저 주장을 하는데 그친다면 ‘철학적 사상’이라고 부르기로 하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 생각이다.

나의 이 개인적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철학적 수상의 길도 자연스럽게 열릴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철학적 사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깔끔한 산문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그것이 다름 아닌 철학적 수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당(閑堂)과의 만남

북한이 1950년에 남침을 감행했을 때, 이승만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국군은 서울을 사수(死守)할 것이므로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목이 쉬도록 거듭 당부했다. 그 말을 믿고 남하(南下)를 서두르지 않았던 탓에 나는 안변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다.

그 유전(流轉)의 끝자락에 청주가 있었다. 1952년 봄부터 청주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 어느 가정의 방 한 칸을 빌어서 세 식구가 비둘기처럼 살았던 것인데, 그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53년도의 1학기 수업이 끝날 무렵에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휴전이 성립된 이상 당연히 서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집이 있던 서울에 직장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장이야 찾아보면 생기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그러나 직장을 얻는다는 것은 그 당시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대학의 시간강사쯤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낙관하고 이리저리 찾아다녔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발등에 떨어진 생계의 문제로 허둥대는 내 꼴을 보고 딱하게 여긴 어떤 친구가 대학이 아닌 학원의 강사라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찬밥 더운 밥을 가릴 형편이 아니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는 나를 끌고 상록학원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독어를 가르치는 그 학원은 서울 도심의 어느 허름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곧 그곳 원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고, 고급반 영어 두 과목을 담당하기로 정하고 작별하였다.

차주환(車柱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원장은 나와 동갑이었고,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젊은 학자로서 다음 해 봄학기부터 서울대학교 중국문학과의 전임강사로 내정되었다고 하였다. 대만으로 유학을 했으며, 그곳 교수로부터 ‘한당(閑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는 것은 후일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한당과 나는 상록학원 근처에 있던 금붕어다방에서 마주 앉게 되었다. 저녁식사가 더 어울리는 시각이었으나, 두 사람의 호주머니 사정이 몹시 가난하던 시절이어서, 밥 대신 차를 들기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당과 나는 그 다방에서 여러 가지 말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 여러 가지 말들 가운데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함께 수필을 써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한당의 말과 그 제안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인 대목이다. 그 자리에서 한당이 말한 ‘수필’이 무엇을 의미했던지 내가 뚜렷하게 이해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분명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말한 ‘수필’ 가운데 내가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철학적 수상’이 포함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으리라는 바로 그 점이다.

한당은 수필 동인(隨筆 同人)으로서 두 사람은 너무 적다고 생각했던지 장기근(張基槿) 선생도 끌어들이자고 하였다. 장기근 선생도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서울대학교 중국문학과의 강사였으며, 상록학원에서도 중국어와 영어를 강의하고 있었다. 쾌활한 성격의 그를 끌어들이는 것은 내 생각에도 좋을 것 같았다.

세 사람의 동인이 한 자리에 모여서 수필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54년 봄이었을 것이다. 맨손으로 모이는 것보다는 각자가 글을 한 편씩 써 가지고 나와서, 그 글을 중심으로 삼고 기탄없는 의견을 나누기로 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의욕도 강했고 취지도 좋았으나 세 사람의 모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수필을 보는 시각 또는 수필관이 서로 달라서 만족스러운 결론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차주환 선생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수필은 필자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험한 어떤 이야깃거리를 골격으로 삼고, 거기에 필자의 느낌 또는 생각을 보태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종의 소품(小品)이었다. 이것은 근래 우리나라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수필에 해당하는 것이나, ‘철학적 수상’만을 마음 속에 두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장기근 선생은 한당의 마음 속에 가득했던 그 소시민적(小市民的) 수필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태평성세에서 먼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을 생각할 때, 수필가의 글에도 치열한 비판정신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것이 장선생의 지론이었다. 나도 장선생의 견해에 대하여 한편으로 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치열한 비판정신이 담긴 글만이 바람직한 수필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철학적 수상’만이 바람직한 수필의 전부라고 믿었던 나의 생각에도 지나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가지 부류의 수필만을 바람직한 수필이라고 보는 편견을 버리고, 어떤 부류의 수필이든 그 나름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은 모두가 좋은 수필로서 평가돼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나는 갖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나로서는 저 ‘철학적 수상’에 대한 염원(念願)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염원을 따라서 ‘철학적 수상’을 얻을 요량으로 몇 편 시도해 보기도 하였으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철학적 수필이라는 것은 초심자가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라는 자성(自省)이 나의 길을 막았다. 그 길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도 한당의 길을 따라서 이를테면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일상적인 수필을 시도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호기심을 따라서 쓰게 된 글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리 맞은 화단’, ‘삼남 삼녀’, ‘초인종’, ‘꾀꼬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초기 작품 가운데서 ‘삼남 삼녀’와 ‘꾀꼬리’ 등은 독자들로부터 과분한 반응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의 과분한 반응은 한당이 문학성을 담고자 했던 일상적 수필에 대한 나의 애착을 더욱 촉진하였다. 처음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뒤를 따랐던 내가 뒤에 가서는 도리어 한당보다도 앞질러서 그 길을 달린 꼴이 되었다.

내 본업이 철학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수필 쓰는 일에 몰입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리(事理)를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몹시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도록 나는 성숙한 위인이 못되었다. 된 것 안 된 것을 가리지 않고 나는 여러 편의 수필을 썼으며, 쓴 것은 모두 잡지와 신문에 투고하였다. 본말이 전도된 나의 처사에 대하여 진심으로 충고하는 우정도 있었고, 뒤에서 수군거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30대 중반부터 시작된 나의 수필 외도(外道)는 중독에 걸린 환자처럼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다만 50대 초반까지는 내 개인의 취미생활로서 수필을 썼을 뿐이며, 어떤 수필 단체에 관여하여 집단적 수필운동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