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어느 날

 

                                                                                      박장원

새봄을 맞아 어느 유명 작가의 수필이 일간지에 실렸다.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는 수필가들도 그런 사유와 감성이 담긴 문체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나톨 프랑스(1844~1924)의 “수필을 미래 문학의 형태로 규정한다.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버릴 것이다. 오늘이 그 현실의 초기 단계이다”라는 진단을 수필가들은 문단의 소중한 아포리즘으로 여기고 있지만, 수필은 아직도 그 ‘어느 날’에서는 멀었는가.

2006년 3월 9일 화창한 봄날, 출판문화회관에 운집한 수필가들에게 빛과 어둠의 흰 실과 검은 실로 팽팽하게 꼬아 힘껏 당긴 활줄이 ‘자유’라는 화살을 퉁기는 절정의 순간, 이것이 바로 카뮈의 문학이 꿈꾸는 ‘정오의 사상’이라고 프랑스 에세이를 소개한 김화영은, 이제 폭넓은 인문적 성찰과 멀고 가까운 곳으로 한가한 시선을 던지며 몽상에 잠기거나 산책하는 교양인의 시대는 끝나버린 것 같다면서 계절마다 출간되는 수필지와 왕성한 수필문단의 활동에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통해 ‘나는 나를 고찰하고, 나를 검사하고, 나를 사고한다… 사람은 확실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알리오!’라는 글귀를 머리맡 벽 위에 써 붙여놓고서 내성적(內省的)인 사유를 인류에 성실하게 전하였다.

프랑스에는 프랑스적인 수필이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적인 수필이 존재한다. 한국 수필도 인간성이나 인간조건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가하고, 그 인식과 관련시켜서 인간 행위의 실태와 가능성을 생각하는 작업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프랑스에는 대체로 철학적·비평적 에세이가 우세한 편이어서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서정적 에세이가 아쉬울 정도로 희귀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는 어느 불문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수필계의 밝은 앞날을 예측해 보면서,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게 자기 자신을 밝혀보려는 수필가들의 고결한 내성을 높이 추켜세우고 싶다.

 

김영만의 ‘세월’은 물살을 거스른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에서도 굴러가지 않는 가슴 속의 징검다리가 있다. 지워지지 않은 아픈 추억의 앙금으로 인해 얻어진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건너가는 것이라는 옭매듭이 축축하다.

 

‘나는 등나무 아래 수돗가로 가 그 물을 잔뜩 들이마셨다. 동생은 그 물을 받아 얼굴까지 문지르며 시원하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날 보고 웃었다. 버스 안의 일행 가운데는 방학이라서인지 부모님들과 같이 나선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화장실에 잠시 들렸다 나와 보니, 동생은 저보다 조금 어린 듯한 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빵과 사이다를 마시는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앞개울 건너 타향 더부살이 떠나는 멋모르는 둘째에게 손을 흔들며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니가 지워지지 않는 잔상으로 남는다. 외숙 댁에서의 꿈같은 닷새를 보내고 형은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왕복차표가 없던 동생은 죽을 힘을 다해 버스를 쫓아간다. 회갑을 넘긴 3형제는 어머니 기일에 영정 앞에 둘러앉아 그간의 세월을 돌아본다. 차마 드러내놓고 밝히지 못하였던 회한은 지나간 시간에 실린 비애감으로 선명히 살아나지만, 끝내 멍울진 징검다리를 훌쩍 건너지 못하니 조그만 표주박으로 변해 버린 동생의 손이 아프게 클로즈업된다.

김흥숙의 ‘밤이 사람을 용서하기로 한 까닭’은 순정한 어둠을 싸구려 분 단장한 나이든 매춘부로 변화시켜버린 현대 문명 아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여전히 꿈을 꾼다는 지적인 메시지로 심도 있다.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로 인해 대부분의 창문들이 열려 있다. 느릿느릿 걷다 보니 어느 창문 턱에 솜털 고운 미백 복숭아 두 개가 놓여 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 한 쌍과 그들의 아들인 듯한 젊은이 하나가 캠핑온 사람들처럼 거실 바닥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자고 있다. 놀랍게도 꿈까지 꾸면서!’

 

문명이 그의 적이었다는 자연주의자의 슬로건은 삐뚤어진 도시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힘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잖아도 씨근거리는 대지 위에 매연의 검은 망토가 섭씨 30도의 열대야로 이끄니 인간은 가엽게도 그 지루한 밤을 굳세게도 버텨내야 한다. 그 끈적거리는 밤을 보내며 꿈까지 꾸는데, 남편은 부하 직원에 대한 안쓰러움과 아내는 남편의 아침 식단 걱정과 갓 전역한 꿈많은 아들은 빈 지갑 때문에 뒤척거리지만, 창문 턱에 솜털 복숭아 두 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상징이 되어 무심한 밤의 시선을 탄력 있게 이끈다.

宣廷垠의 ‘숲 언저리에 가을이’는 사고의 질감이 맑으면서도 서늘하여 자신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짧지만 소중한 삶에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생활태도의 고찰은 너무나도 빛바랜 잠언이지만, 그 인생 산책로에 등장하는 대화는 새로운 앵글로 빛난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가 정연한 얼굴. 미인이다. 예쁘거나 섹시한 게 아닌 기품 있는 미인. 가슴이 뛰는 걸 느꼈는데 어찌 된 셈인지 발걸음은 더 빨라져 성큼성큼 여자를 앞서 나갔다. 미인과 얘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렇듯 어이없이 놔버리자 산행을 하면서도 미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미모 따위에 관심 없는 대범한 남자 행세를 한 셈인데… 도대체 왜 그런 바보짓을. 스스로에게 불평을 하였다.’

 

가슴 뛰는 기품 있는 미인을 성큼성큼 지나치는 뒷모습에서 위선과 갈등의 숨김이 두드러지고, 바보처럼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독백의 울림이 어이없다. 그리고 저만큼 숲 언저리에 가을이 시계를 보며 서 있다는 시적 맺음으로 완숙된 서정이 도출되기에, 사소한 울력으로 만난 착한 아주머니와 흘낏 스친 이목구비가 정연한 여인을 어느 보살의 현신이라는 과장에도 불구하고 흥취가 있다.

이고운의 ‘종에 구름 무늬가’는 선미(禪味)에 잠겨 고요한 소리로 번진다. 정서적 이미지의 시어들이 공감각적인 세련미로 곱다. 시 반 산문 반, 유연한 운율과 정제된 구상으로 교직된 시산문. 구름 무늬가 새겨진 둥근 가슴의 소리가 사는 집의 울림이 있다.

 

‘오장을 안고 사는 역려(逆旅)의 나그네. 나는 언제 소리가 와서 머무는 종이 되려는가. 소리만 보듬고도 우그러지지 않는 둥근 가슴이 되려는가. 땅에 가깝되 하늘에 멀지 않고 하늘에서 멀되 가까이 달려서, 끊어졌는가 하면 다시 이어지는 맥놀이……. 저 구름으로 피어나는 소리 꽃이.’

 

바람은 가슴에 가슴에 씨가 되는 무늬로 돋을새김하기 위해 장부(臟腑)의 홍진을 태우고 끓였고, 가슴은 천 년을 맴도는 소리가 사는 울림상자가 되기 위해 두드리고 굳혔을 것이다. 구시렁거리는 사바세계의 이 소리 저 소리가 천년을 맴돌고 억겁을 휘돌다 푸르른 하늘 흘러가는 흰구름으로 활짝 피어난다. 자칫 충돌하는 시의 상징성이 산문의 명징한 구상을 잠식할 소지는 있지만, 깊은 심상과 묘한 형상 속에 울려퍼지는 은은한 소리에 귀를 모은다.

유혜자의 ‘어머니의 강물’은 자신을 고찰하는 인생의 탯줄이 되어 시퍼렇게 치렁하게 세차게 반짝거리면서 신앙의 힘처럼 내면에서 출렁거린다. 슬프게 각인된 고향의 강에서 발원한 강줄기는 이중구조 속에 숨겨놓은 삶의 메시지를 갈구하는 끝없는 움직임이다.

 

‘어느 날 나는 강물에 깃광목을 빨아 강둑에서 바래는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방망이로 두들겨 빨아 푸르른 강둑에 펼쳐 널어놓았다. 그 위로 팔랑팔랑 하얀 나비가 달콤한 향기를 찾아 날아다녔다. 평소 살갑기보다 엄했던 어머니도 물가에서 찰랑찰랑한 내 기분을 맞춰주었으나 이따금 강물 따라 멀리 보내던 외로운 시선을 잊을 수 없다.’

 

강둑에 길게 펼쳐놓은 깃광목 위로 달콤한 향기를 찾는 하얀 나비의 팔랑거림과 강물 따라 멀리 보내던 어머니의 외로운 시선의 접점에는 애잔한 은유가 도사린다. 그리고 물가에서의 찰랑찰랑한 뜻맞춤은 내면의 흐름이 되어 그에게 애수를 넘어선 힘의 세계로 이끈다. 2호선을 타고 귀가하다가 당산철교에 이르러 차창을 통해 휘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사랑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가슴을 따듯하게 한다.

구민정의 ‘보안당이 있던 자리’는 도서관에서 바라보이는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피우고 있는 줄담배를, 독서실 휴게실에서 지켜보던 두어 평 되는 안경점 주인의 담배연기를 통해 적자생존의 현장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계절이 바뀌고 독서실 정기권을 다시 끊었다. 그만 그를 보고 싶어도, 내가 휴게실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그는 늘 가게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피워내는 담배연기가 실성한 사람마냥 산발한다. 특히 해거름에 허공을 향해 직격포를 쏘아 댈 때면 보기가 민망스러워 얼른 자리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타들어가는 것이 어디 담배뿐이랴.’

 

사방으로 전원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위치에서 움츠러드는 한겨울의 동면을 스토커처럼 쫓는 그의 시선이 아릿하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경점 주인의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도태되는 혹독한 세상(世相)의 밑그림이 그에게 심상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픈 내성의 축적이며 고달픈 이해에서 움텄을 것이다. 어서 빨리 목청 돋우지 못하는 겨울잠에서 깨어나 밝은 빛의 거리에서 껄껄웃음으로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김수영은 쓸쓸한 한국적인 인생의 표정이 어쩌면 유머러스하게 느껴진다며, 페이소스는 쉽지만 예술은 어렵다고 하였다. 슬픈 것을 슬프게, 기쁜 것을 기쁘게 전하는 것은 약하다. 여과된 희로애락은 색다르니, 기쁨에서 촉발되는 애수, 슬픔에서 우러나는 웃음은 강하다. 때문에 슬프다 기쁘다 하기보다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정서는 상당히 미묘한 감정이며, 이러한 정감은 미묘한 구상이나 표현이 아니면 구상화할 수 없다는 이론을 수필가들은 추중(推重)하였다.

규모의 팽창에 기인하는 수필의 질적 저하에 대한 메타적 할큄도 있지만 현대수필은 다양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했던 말을 되풀이 하지 않고 남들이 본대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새롭게 변하는 새로운 것을 찾아 미묘한 구상과 표현으로 해맑은 한국적 인생의 표정을 전하는 어느 날은 머지 않았다.

 

 

<수필문학>과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평론가.

수필집 『양수리』, 수필평론집 『코끼리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