껌 씹는 맛

 

                                                                                김시헌

대구에 간 일이 있다. K씨를 방문했다. 그는 최근 몇 달 동안 난치병을 앓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의외라는 듯 반기면서 여윈 손을 내민다. 투실했던 옛날의 건강한 손은 간 곳 없고 나의 악력이 지나칠까봐 주저가 된다.

평소에도 그는 사람을 만났을 때 환성을 올리거나 과장된 인사말을 하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그날도 악수뿐 말이 없다. 다리, 팔, 눈, 표정 어디에도 병마에 시달린 피로한 모습이다. 언제나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던 그였는데 입고 있는 복장에도 나태가 보인다. 세상 일에 무관심해진 모양이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정이 움직인다. 외로워지면 사람이 그리워지리라. 병에 걸렸던 처음은 방문객도 많았는데 지금은 사람의 발길도 끊어졌다고 한다.

 

나는 부질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면서 “껌 씹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한다.

껌 씹는 맛이라, 평범한 말이지만 뜻이 담겼다. 그 말 속에 K씨의 마음과 동작이 다 표현된 것 같다. 나는 그 표현이 가시처럼 가슴에 걸린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무료하다는 뜻이리라.

 

K씨의 방 벽에는 예술사진이 몇 폭 걸려 있다. 그는 사진작가이다. 옛날의 화려했던 생활을 증언이라도 하듯 생기에 넘치고 있다.

방 구석에는 바둑을 두다가 둔 흔적이 있다. 가족과 바둑을 두는 것일까, 이웃집 사람이라도 와서 그와 시간을 보내주는 것일까. 이야기하는 것조차 피로해 보이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말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벼운 관심을 보낸다.

고장난 기계 같다고 할까. 기능이 좋게 돌아가던 자동차의 나사가 몇 개 늦추어져버린 광경이다.

청년이라면 희망과 의지를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껌 씹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가 그의 귀에 새로우랴?

한참 후에 다시 한 번 악수를 하고 그의 집을 나왔다. 인간이 거쳐야 할 불행한 한 토막을 보고 나온 느낌이다. 걸음에 힘이 빠진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있다.

껌 씹는 동작은 K씨만의 생활이 아니다. 어쩌면 나 자신의 생활인지도 모른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껌을 씹어야 한다. 삼사십 대까지만 해도 껌맛은 달고 쫄깃하다. 껌의 달콤한 맛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노년의 껌은 아무 맛도 없다. 그런데도 쭈걱쭈걱 씹어야 한다. 맛도 없는 껌을 왜 씹어야 할까. 반드시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미(無味) 속의 맛(味)! 반복 속에 있는 무미(無味)! 그것은 무(無)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건널목인지도 모른다.

 

40대 때, 어느 미술 전시회에 간 일이 있다. 여러 작품이 놓여 있었다. 돌아보다가 한 곳에 발길이 머물렀다. 마룻바닥을 하얗게 닦아놓고 그 옆에 걸레를 얹어두고 ‘선(禪)’이라고 제목을 붙여놓았다.

무슨 의미인가? 하고 있는데 작가 자신이 옆에 왔다. 이것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는 예사로운 표정으로 때가 묻은 마룻바닥을 하얗도록 닦자면 같은 동작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겠습니까 한다. 말뜻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禪)이로구나, 선(禪)의 경지를 다는 모른다. 하지만 닦고 닦아 마음의 바닥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이리라.

아직은 겨울이 가로수를 뒤흔들고 있다. 바람 속을 걸으면서 K씨의 껌 씹는 맛을 생각해 본다. 무료한 껌 씹는 맛은 K씨만의 것은 아니다. 지우면 나오고 뽑으면 다시 돋는 여름의 풀 싹처럼 사람의 의식은 자신을 끝없이 괴롭힌다. 그 풀 싹을 잠재우는 작업이 껌 씹는 맛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