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同氣)의 상실

 

                                                                                     고봉진

동생을 마지막 본 것은 구정 연휴 때다. 그날도 의식은 맑았지만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있지 못할 정도로 간헐적인 격통에 시달리는 모양을 보고 돌아오자니 차라리 이제 그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회복할 가망도 없는 병상에서 무작정 더 오래 견디기만 바라는 것이 오히려 몹쓸 짓 같았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아야겠다고 다시 주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금요일 아침에 부음이 먼저 왔다.

어릴 때는 부모 중 한 분이라도 없는 세상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여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년에는 어머니가 뒤를 따랐다. 그때마다 자식이 살면서 부모를 여의는 것은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손아래 동생이 먼저 가는 일을 당하니 느낌이 아주 다르다. 해 전에 겨우 회갑을 지냈으니 요즘 감각으로는 아직 젊은 나이다.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 속 한 구석이 뻥하고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이 더 절실하다.

동생은 5남매 중에서 끝에서 두 번째다. 막내가 제 밑에 있어서인지 자랄 때부터 별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혼자 잘 놀았다. 이목구비는 다 큼직했지만 체구는 형제 중에서 제일 작아 언제나 존재감이 좀 희미한 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상급생이었으니 그 동생이 네댓 살쯤의 일이라고 기억한다. 어머니가 장기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임지에 머물다 이모 두 분과 같이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다. 마중을 나간 식구들까지 떠들썩하게 어울려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 둘러앉아 그 동안의 일들을 다투어 이야기하다 보니 동생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늦게야 깨달았다. 오는 길에 혼자 떨어져 집을 지나친 것으로 판단한 나는 뛰어나가 동생 이름을 부르며 큰 길을 정신없이 달려갔다. 시내를 거의 다 벗어나 지역 주둔군 부대 정문 앞 초소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숨이 턱에 닿아 보초에게 혹시 울고 가는 꼬마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더 이상 가 보아야 인가도 없고 보리밭만 계속 되다가 앞산에 이른다. 그런 곳에는 애를 잡아가는 문둥이가 많다고 어린이들이 잘못 믿고 있었을 때였다.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뛰어 되돌아와 보니, 이웃 파출소의 연락을 받고 집에서 꽤 떨어진 경찰서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찾으러 어머니가 막 떠난 뒤였다. 우체국 앞 삼거리에서 저 혼자 다른 길로 울면서 걸어간 것이었다.

동생은 비교적 의지가 약한 편이었다. 어릴 때 날씨가 몹시 추운 날은 학교에서 툭하면 울고 돌아왔다. 그러나 윗사람 말에는 고분고분하게 순종을 잘하는 편이라 고약한 이 형 말도 잘 들었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 숙제를 다 못해서 개학하는 날 아침에 울면서 등교를 하는 것을 보고, 그 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그날부터 5일 안에 모든 숙제를 다 하라고 했다. 설마 했는데 날씨 난만 비워놓고 일기 숙제까지 다 해서 중간 등교일에 학교에 들고 갔다가 담임선생의 칭찬 아닌 꾸중을 받고 온 적도 있다.

대학 재학 중에 학적 보유병으로 군에 다녀온 나는 집이 서울까지 이사를 왔다가 낙향을 한 뒤라 그때 고등학교를 다니던 이 동생과 그 밑 중학생 막내와 함께 자취를 하며 공부를 했다. 대구에서 중학을 마친 동생은 고등학교 진학 때 올라와서는 일차 지망을 했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 뜻에도 없는 후기 실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청운동에서 동숭동까지 도보 통학을 고집했던 나는 매일 이 동생하고 귀가 시간을 정확히 맞추었다. 남영동까지 전차로 왕복하는 동생에게는 부득이 할 경우를 상정해서 30분 정도의 여유를 주긴 했지만 학교에서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와 정신없이 잡담을 하다 늦었다는 날도 30분 이상 지체한 경우에는 체벌을 가했다. 3년이 가깝도록 그런 생활을 같이 한 후 동생은 소위 일류대학교 중의 하나라는 곳에 합격을 했다. 다니던 학교가 주로 취업을 위주로 하는 곳이라 1년에 한두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시골 아버지도 기뻐했지만 서울의 3형제는 다같이 흔희작약을 했었다.

동생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엘리엇의 시를 암송하기 좋아했고 조이스의 소설도 들고 다녔다. 음악 감상실도 다니며 그러한 대학생활을 무척 즐겼다. 한때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었지만 졸업을 한 후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두고두고 그때를 가슴 뿌듯이 회상하며 그리워했는데, 그 동안 내 의식 속에 쌓여온 잡다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러한 일들이 이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허허로운 느낌이 들어 가슴만 답답하다.

형제 간이라 해도 각기 가정을 이루고 나면 다 제 살기가 바빠 서로 간섭하는 일이 드물어진다. 동생은 직장을 자주 바꾸었다. 처음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신문사에도 다녀보고, 그 뒤에는 한 광고회사 운영도 맡아 보았다. 그러나 다 흐지부지 그만두고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그때 아직 대학 재학 중인 조카 남매 둘을 서울에 남겨두고 연고지도 아닌 공주 지방으로 내려갔다. 산 속 작은 마을에 방갈로를 짓고 살며 오디오로 클래식을 듣고 느지막하게 재미를 붙인 유화를 그렸다. 여기저기 작품전에 참가해서 몇 번 입상은 했지만 본격적인 개인전을 준비하는 중에 병으로 쓰러졌다.

낙천적인 성격이라 공기 좋은 산골에서 가장 건강하게 장수할 것으로 예상을 했는데, 발병을 하자 병에 대한 저항력이 심신 양면에서 부족해 보였다. 회복하는 율이 높다는 병에 걸려서도 효과적인 대처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고향집에 어머니를 그린 유화 한 점이 대표작으로 남았다고나 할까.

어쩐지 동생이 잘 외우던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연가’ 첫 구절이 자꾸 머리 속을 맴돈다.

‘Let us go then, you and I, /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