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몸살

 

                                                                                  한후남

천리향이 흐드러지게 핀 줄도 몰랐다.

호되게 몸살을 앓느라 꽃에 물주는 것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출근하는 남편 식사도 못 챙겼으니 화초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둑한 침실에 누웠으니 몸이 천근만근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 거실에 나와 신문을 뒤적이자니 강아지가 문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미물조차도 봄기운에 마음이 동하는가 싶어 베란다 문을 열어주려니 천리향 향이 어지럽게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 네가 나보다 낫구나. 향기에 취해 꽃마중을 하고 있으니…….

쾌청한 날엔 시린 하늘 빛에 제 영혼을 비춰보는지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럴 때의 모습은 거의 탈속의 경지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낮잠에 빠져들다 내 게으름이 무안해져 얼른 책을 집어들 때가 있다.

베란다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고진다. 꽃기린과 베고니아, 클로버 꽃은 일 년 내내 피고, 2월에 천리향이 제일 먼저 별꽃을 피우고 나면 겹동백도 연달아 피어나 붉디붉은 생목숨을 뚝뚝 떨군다. 고혹적인 자주 입술 개발선인장, 음전한 마님 군자란, 날라리 여고생 쟈스민, 눈이 시린 석곡이 연이어 꽃을 피운다. 5월에 들어 아마릴리스와 도도한 공작선인장이 베란다를 제압하고 나면 수국이 눈물 같은 꽃을 피운다.

나태주 시인은 수국을 ‘는개 자욱한 날 성장 차림으로 집을 나와 버린 젊은 아낙네’라고 읊었다. ‘우산을 씌워서 가려주고 싶다’고도 했다. ‘살갗에 돋은 소름의 얼룩’, 수국의 이처럼 적확한 표현은 보지 못했다.

오래 전, 거제 청마 생가에 들렀다가 오도카니 비에 젖는 수국을 보았다. 사그라지고 있는 푸르디 푸른 목숨에 가슴이 에이는 것 같았다. 파랗게 질린 꽃무리가 온종일 발치에 밟히더니 기어이 내 집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이듬 해 봄, 결국 그 애잔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 5일장에서 수국 두 그루를 샀다. 조 시인이 이사가면서 주고 간 자배기에 구멍을 뚫어 정성껏 수국을 심었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자리잡아 주었건만 첫 해에는 녹두알만한 꽃망울이 미처 크기도 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물 주기를 하루만 거르면 싱싱하던 잎사귀마저 고개를 푹 꺾고 다 죽어가는 시늉이다. 흙을 그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하기야 땅에서 까마득한 15층 공간에서 제대로 꽃피우기란 불가능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지 않은가. 이사 와 몇 년은 허방을 딛고 선 것 같아, 앉아도 누워도 안절부절못했다. 축 처진 수국 이파리를 보면 내 속도 같이 타들어갔다. 다른 식물처럼 빨리 고향을 잊고 이 척박한 공간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원동역 근처로 매화 마중을 갔다와서 몸살이 났다. 출발할 때는 제법 봄볕이 포근했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것이 아닌가. 사 월을 목전에 두었는데 웬 눈보라란 말인가. 산자락의 침엽수들은 이미 흰 눈에 덮여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산비탈에 비켜서서 온몸으로 눈보라를 맞고 있는 매화나무에 다가갔다. 흰 눈 속에서 더욱 요염한 홍매 몇 가지를 꺾었다. 이 궂은 날씨에도 의연하게 운전을 해 주는 문우에게 바치기 위해서. 홍매의 달금한 향을 맡으니 화담 서경덕의 사랑을 갈구했던 황진이가 떠오른다.

점심에 맛깔스런 토속 음식을 들었건만 굽이굽이 고갯마루를 돌며 차가 눈발에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처박히는 상상을 했었던지 그날 밤, 토사곽란이 일었다.

하얀 단지에 청매 몇 가지와 홍매 한 가지가 열흘이 넘도록 꽂혀 있다. 앙증스레 쪼그라든 잎조차도 매화의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고 있어 버리지 못하고 그냥 보고 있다. 옷자락이 스치는 기운에도 마른 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날린다. 꿈결인 듯, 흐드러진 매화와 더불어 낙화도 오래도록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경남문학> 신인상 등단.(90년) <수필문학> 천료.(96년)

성주사 사보 월간 <곰절>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시간의 켜』.(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