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입히기

 

                                                                                     서 숙

“그렇게 하늘을 그리고 싶으면 그려야지 어쩌겠어요.”

한참을 말없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림을 응시하던 선생님은 미소를 담아 말씀하셨다. 우리는 와아 웃음을 터뜨렸고 그림의 주인공은 엉뚱한 행동을 한 아이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우리를 따라 저도 같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미술 시간, 교정에 나가 풍경화를 그린 후의 작품 평가 시간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건물과 잔디밭과 나무들을 하늘을 배경으로 대동소이하게 그렸다. 그런데 그 애의 그림은 전혀 달랐다. 뾰족한 지붕 끝이 보이는 도화지의 아랫면 아주 조금을 제외하곤 온통 그저 파랄 뿐이었다. 흰구름이 한 조각 떠 있었던가, 아무튼 독특한 구도에 명암도 없는 단색이었다.

스케치북 한 장을 파랗게 칠해 놓은 학생의 파격도 파격이려니와 풍경화가 이래야 한다는 둥 저래야 한다는 둥 진부한 언급이 없었던 선생님도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교 시절에 만난 예쁘장하고 자그마했던 미술선생님, 그분의 차분한 인도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르누아르의 소녀들이 간직한 부드러운 분홍색 피부의 환영과 위트리요의 설경이 주는 우수어린 흰색의 노스탤지어와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성들이 자아내는 처연한 멜랑꼬리에 눈뜨게 되었다.

그때 그 친구가 그린 파란 하늘은 나에게 하나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한 대담한 시도는 ‘누가 뭐래도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는 외침으로 들렸다. 때로 너무 독특해서 튀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 남들이 미처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도 파란 하늘을 그리고 있구나.

성찰이 있어 인간일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고뇌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꾼다. 좋으면 그냥 좋고 싫으면 그냥 싫고, 왜라고 묻지 않는 삶. 때로 안으로 침잠하고 의미를 찾고 하는 일들에 싫증이 나고 귀찮아지면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제약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그런 마음의 파동으로 인해 시야에 하늘이 들어차게 되는 날이면 나도 큼지막한 사각형의 화면에 푸른 하늘을 가득 넣곤 한다. 그때 그 친구의 흉내를 내어보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녹색으로 뒤덮인 풀밭을 보면 아무것도 담지 않고 시야에 가득 풀밭만을 그려넣는다. 색종이처럼 단 한 가지의 색으로 세상을 덮어보는 것이다. 그러한 단조로움에 대한 동경은 상대적으로 복잡한 머리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그러다가는 이내 큰숨 한 번 들이켠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 계속 심호흡을 한다. 그러면서 타이른다. 한 가지 색으론 충분하지 않아, 세상에는 얼마나 다채로운 색들이 있는데 오직 한 가지에 매달린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 속에 깃든 모노톤을 지운다.

그렇다고 다양하고 현란한 색채의 향연이 쉬운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색깔에의 시도가 선명한 색상을 제대로 살려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지 색을 덧입히는 형국이 되어 우중충하여 갈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뭐라 이름 붙이기 곤란한 어둑신한 색이나 만들어내기가 십상이다. 딱하게도 자신의 색을 찾지 못하고 덧칠 범벅 속에서 헤매는 꼴이다. 그러니 마음 속에나마 주조색은 한 가지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에 깃든 자기만의 색깔 하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내다 보면 살아가는 길목 어느 때, 어디쯤에선가는 한번 맘껏 펼쳐보일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못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색으로 강요할 때 사람들은 몹시 불행할 것이다. 그와 달리 “그렇게 그리고 싶으면 그려야지요”라고 조용히 말해 주며 선선히 받아주는 사람을 용케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드물게 찾아온 행운을 기꺼이 즐겨 그 그늘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으리.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