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시의 목소리

 

                                                                                    이정신

소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면서 계시적 힘을 지닌다.

조용히 속삭이는 사랑의 고백, 여인의 울부짖음, 한여름 밤의 천둥 소리, 유년 시절 가슴 졸이며 듣던 곡마단 나팔 소리, 색소폰의 흐느끼는 소리, 군중의 함성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뛰기도 하고 슬퍼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청각을 통해 저장된 소리는 오랜 세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선명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어떻게 그처럼 선명하게 오랜 세월 동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을까.

수십 년이 흘러간 지금도 유년 시절 명절이 다가오는 날 밤, 어머니가 내 색동저고리를 만드시려고 돌리던 달달거리던 재봉틀 소리, 그 긴긴 겨울밤, 바람에 삐걱대던 덧문 소리가 조용히 리드미컬하게 들려온다. 외출하셨던 아버지가 기쁜 소식을 갖고 귀가하시던 날, 아버지의 힘찬 발자국 소리도 들려온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 한 해가 지난 그 옛날.

새 학기가 시작된 화창한 봄날, 수업이 끝나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나간 직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하는 소리가 복도 창문 쪽에서 들렸고 난 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창문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정신 차려”, 어린 나이지만 그 말은 내 이름을 두고 누군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교실 문 쪽으로 달려가면 어느 새 그 남자아이는 노루 새끼처럼 사라지고 난 후였다.

두어 달 후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어느 날, 수업이 끝나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아카시아 나무 밑을 지나는데 나무 위에서 “정신 차려”, 힘차고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서야 그 아이가 우리 동네 사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인 3학년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숭이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던 그 아이는 내 눈과 마주치자 뛰어내렸고, 노루 새끼보다 더 빠르게 내 앞에서 내달렸다. 쫓아가서 ‘왜 나를 놀리느냐’ 따지고 싶었으나 어느 새 자취를 감추었다.

계절이 바뀌었고 그 해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마당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데 대문 쪽에서 “정신 차려” 하는 그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뛰어나가 보니 그 아이는 자기 집 쪽으로 뛰어가다가 발로 돌멩이를 차면서 나를 향해 “우리 집 오늘 이사간다” 했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밀려왔다.

나도 그 아이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내 앞에서 달려가던 아이는 이미 이삿짐을 실은 조그만 트럭 위에 엄마와 함께 올라타 있었다. 조금 후 이삿짐 트럭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났다.

표현할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오는 순간 “정신 차려” 하는 그 아이의 맑고 힘찬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고, 그 아이와 그의 엄마를 태운 트럭은 신작로 길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가을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가는 것과 신작로에 먼지가 흩어져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서 있었다.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조차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신비하게도 맑고 힘찬 그 아이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가던 이삿짐 트럭, 그 이삿짐 위에서 작은 몸이 흔들리면서 “정신 차려” 하며 외치던 맑고 힘찬, 그러면서도 약간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면서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찌 보면 이미 아주 먼 옛날, 하느님이 그 아이 목소리를 빌려 나에게 계시를 주신 것일까.

어떤 경우 소리는 감동적이면서도 계시적 힘을 갖는다. 그 아이의 맑고 힘찬 목소리가 지금은 나의 남은 삶을 ‘정신 차려’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새겨본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 다시 기억 속에서 오래된 흑백 영화 한 장면이 다시 돌아간다.

이삿짐 트럭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떠난다. “정신 차려”, 조그만 몸을 흔들면서 그 아이가 소리친다. 그 아이가 떠난 신작로 위로 뽀얀 먼지가 흩어져 사라져가고 맑은 가을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간다.

 

 

<수필문학>으로 등단.(2003년)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 추천작가회 이사.

수필집 『바람의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