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제(無題)

 

                                                                                김창진

당신과의 동행(同行)입니다.

장고항(港)으로 가는 길입니다.

서해안 고속도로 하행선에서 서해대교를 건너 송악으로 빠져나가면 당진(唐津)의 바닷가에 이르고 거대하게 이어지는 철강단지(鐵鋼團地)를 지나, 긴 방조제(防潮堤)를 만납니다. 그리고 갑문(閘門)이 있어, 방조제로 해서 생긴 아주 넓고 넓은 강 같은 너비의 물이 본디의 해안을 이제는 담수(淡水)로 적시나, 방조제 길 쪽은 물론 직선으로 따릅니다. 당신과 나는 늦가을의 이 길을 갑니다. 자동차 길이 휑하게 뻗쳤습니다. 너무 길어서 얼핏 무의미하게 다가옵니다. 바른쪽의 둑 위에 오르면 거기 서해안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 해원(海原) 앞에서 우리는 마땅한 깃발을 흔들지 못합니다.

 

‘날씨가 좋은 6, 7년 전 겨울의 어느 날, 나카다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서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바다가 그대로 신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임을 깨달았다. 한번 깊게 깨달으면 그 일은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날씨가 좋은 날 나카다 바닷가에 가기만 하면 거기에는 내 영혼을 밑바닥에서부터 깊숙이 위로해 주는 영원히 짙푸른 바다라고 하는 가미(神)가 있다.’``─``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

 

서해안의 바다가 왜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지, 그리고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영혼을 밑바닥에서부터 깊숙이’ 흔드는 해풍(海風)으로 그리 쉽지 않습니다. 둑에서 내려와 바람을 피합니다. 왼쪽의 담수호(淡水湖)는 안온합니다. 몇 마리의 오리들이 그냥 떠 있습니다. 거룻배가 조용히 흔들립니다. 그리고 호심(湖心)의 저 너머, 가을 들판의 기슭을 적시고 있는 물가에는 서로 서걱댈 틈이 벌써 설핏해 보이는 갈대숲입니다.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가에는 유채꽃길이라는 팻말이 여름날의 이 행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꼭 섣달께의 보리밭 골의 한 이랑쯤의 너비로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른 풀길이 내내 우리 곁을 따릅니다.

그때, 아까 본 바다와는 달리 호면(湖面)의 조용함에도 잔잔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물의 표정을 우리는 그만 보아버립니다. 용하게도 버티어 온, 아니 감당하기 힘들어 잊어버린 미해결(未解決)의 세계들이 감정의 섬세함으로 우리들에게 찰랑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짐짓 안 본 것으로 그냥 넘기려 했던, 아까 갑문을 지나자마자 물가의 언덕배기 늦가을 오후의 스산한 풀밭에서 졸다시피 하고 있던 산양(山羊) 몇 마리의 을씨년스런 모습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조수(潮水)와 담수(淡水) 사이를 가르고 있는 갑문 바로 가까이의 너무 흥건한 물바다에서 산양이라니……. 느닷없음의 당혹함에 이어지는 그 존재의 너무 심한 이방성(異邦性)에 우리는 애써 눈감았는데, 그 산양까지 저 미해결의 물살에서 떠오른 것입니다.

장고항이라지만 포구(浦口), 아니 그냥 바닷가의 조그마한 물가입니다. 그 해안의 소나무 숲을 따르면 용무치라는 또 바닷가입니다. 배 한 척이 급히 빠져나간 물결에 뒤척인 듯 넓은 갯벌 한가운데에 기우뚱 얹혀 있습니다. 여름날 하마의 몸뚱아리에서처럼 해변의 권태 같은 걸 봅니다.

멀리 수평선 저 너머에서 긴 해조음(海潮音)의 음률과 함께 바다가 곧 밀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거기서 ‘가미’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귀로에 올랐습니다.

서해대교에 이르기 전에 서쪽 하늘이 물들기 시작하는 일몰(日沒)을 만납니다. 참 장렬(壯烈)한 낙조(落照)의 시간입니다. 근처 하늘의 많은 구름들이 제각기의 생긴 모습에서 빛을 받아 너무 곱습니다.

미해결도 섬세함도 불안도 고독도 없습니다.

저 장렬함이여!

 

빌 더글라스의 ‘아침이 열리는 숲에서’가 들립니다.

‘안개 속의 풍경’으로 아침을 엽니다. 연약한 햇살이 안개 사이에서 어째서 그토록 찬란한가를.

무용한 짓은 하지 않는 우리 집 개 자룡이는 이 새벽에 조용합니다.

당신의 숨결도 잦아듭니다.

 

 

전 가톨릭대학교 교수.

산문집 『나폴레옹, 클래식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