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해

 

                                                                                김녹희

큰아들이 힘든 재수 끝에 대학에 합격한 즈음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우연히 동네의 통장을 맡고 있던 아주머니를 만났다. 숫기가 없는 나는 이웃과 거의 내왕이 없었는데, 그이는 우리 아이가 입학하게 된 걸 어떻게 알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반색을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축하허우,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다죠? 무슨 과유?” 나는 “인류학과예요”라 대답했다. 그런데 반가워하던 그녀의 표정이 일순 멈칫 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얼마나 좋수. 그 대학에서 일류과에 들어갔다니…….” 내가 그 말뜻을 알아차렸을 때, 통장님은 총총걸음으로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 후로 사람들에게 아들의 ‘과’를 말할 땐 혀에 잔뜩 힘을 주어 ‘인리우학과’라 발음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G.E.의 한국 지사로 발령받아 귀국한 친정 남동생이 어느 날 남편 사무실을 방문했다. 얘기를 나누는 도중 남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동생은 구석진 곳의 의자로 옮겨 앉아 기다렸다. 손님이 남편에게 자기가 G.E.와 관계된 일을 한다고 말했다. 동생은 그 장면을 얼굴이 붉어질 지경으로 부끄러워하며 되새겼다. “그 사람한테 매형이 나를 가리키며 ‘저놈도 G.E.에서 일하잖아요’ 그러잖아. 내가 거기 부사장인데 내 입장이 어떻겠어.” 동생은 한참 전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있었던 듯 농담처럼 하소연하곤 미국으로 떠났다.

그날 퇴근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그는 내 동생처럼 얼굴이 붉어지더니 화를 냈다. “‘저놈’이라 그랬을 게 뭐야. ‘처남’이라 그랬지.” 남편의 발음이 분명하지 못한데다 처남이란 단어에 낯설었던 동생의 귀 탓이었다.

이렇게 잘못 알아들은 단어 하나로 오해가 생긴다. 아니, 어떤 경우라도 오해는 생긴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 즈음 나는 여행 뒤끝에 병이 나서 어지러움증에 시달렸다. 그날은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있었다. 안방에서 기운을 못 차리고 누워 있었는데 모임을 주관하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막내가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릿속이 피잉 하며 쓰러질 것 같았다. 전화를 받으러 일어서기는커녕 앉아 있기도 어지러워 도로 자리에 누웠다. 나는 막내에게 몸이 아파 전화를 받을 수 없음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은 막내에게 “엄마가 어제도 아팠느냐?” 물었는데 사정을 잘 모르던 막내는 아니라고 말씀드렸단다.

그 일은 서로에게 깊은 흠집을 남기게 되었다. 그분은 전화를 안 받은 나의 무례에 큰 상처를 받았고, “오죽하면 전화까지 못 받겠나 하며 많이 걱정하시겠지…….” 위로를 기다리던 나는, 그 후 계속되는 그분의 싸늘한 태도에 당황했고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낯모르던 이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까운 관계에서도 아주 사소한 일로 오해는 시작된다. 미당의 ‘신부’에서는 첫날밤에 오해로 새색시를 버린 까닭이 오줌이 급해 나가던 신랑의 옷자락이 문고리에 걸린 것 때문이었고, 지극히 사랑하지만 오해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고통 속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비극도 한 장의 손수건 때문이 아니던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그렇게나 별것도 아닌 일로 비롯된다는 건 아이러니다.

흔히들 의사소통이 안 되어 오해가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대화가 그 걸 푸는 열쇠라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소한 일이기에 오히려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그것을 언급하는 게 너무나 민망하고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오해’를 차마 내색하지 못한 채 말 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그러는 동안 작은 오해는 눈덩이 굴리듯 커져간다. 혹 상대방이 눈치채고 마음을 돌려보려 애써도 이미 닫혀진 문을 더욱 굳게 잠글 뿐이다.

오래도록 따뜻했던 사이를 단번에 얼음처럼 굳고 차게 식혀버리는 게 오해의 특성인 것 같다. 그 동안의 따뜻했던 온도만큼 더 차가워진다. 그런 걸 보면 역설적으로 냉랭한 겉보기와 달리 오해의 속엔 상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그 기대가 어그러져 통장 아주머니도 친정 남동생도 또 전화를 안 받아 불쾌했던 이도 잘못 들은 말 한 마디에, 작은 행동 하나에 그렇게 기분 상했던 걸게다.

그런데 ‘오해’는 나쁘기만 한 게 아니어서 때로 사람들에게 천사의 눈을 덧씌우기도 한다. 별치도 않은 성품이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인품으로 보인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솟아나는 것도 오해가 아니면 가능한 일일까? 호감을 갖고 바라볼 때 그 혹은 그녀의 무심한 몸짓 하나, 순간의 미소가 문득 보석처럼 빛난다. 다른 이의 눈엔 촌스럽거나 투박한 모습과 말투가 그만의 순수하고 독특한 매력으로 돋보인다. 쇼펜하우어가 일생을 통한 연구와 깊은 깨달음으로 ‘사랑은 없다’고 결론지었어도 오해의 마력이 있기에 불꽃 같은 사랑이 존재하리라.

오해가 없는 세상… 참 좋은 말이지만 오해로 인한 괴로움과 상처가 없는 대신 냉정하고 덤덤한 시각으로만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도 얼마나 삭막한 일일까.

어쩌면, 이 세상에 오해가 가득 하기에 나의 삶이, 모든 이들의 삶이 크고 작은 재미있고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차는지도 모르겠다.

 

 

<수필문학>으로 등단.

전 에세이 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