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박

 

                                                                                  이경수

꼭지에 칼을 대는 순간 ‘쩌어억’ 하며 금이 간다. 이내 과즙이 흘러내리고 농익은 살이 드러난다. 까만 씨가 촘촘히 박혔다. 모처럼 제대로 익은 수박을 산 것 같아 흐믓하다. 속이 노랗거나 희끄무레한 씨가 드문드문 박힌 것을 만나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여름방학이면 나를 외가에 보내곤 했다. 낯가림 탓에 친척이든 아니든 남의 집 가기를 싫어하는 나였지만 외가에 가는 것만은 그렇지 않았다.

청계산 자락 깊숙이 자리한 외가 마을, 그리고 안양에서 시오 리쯤 떨어진 우리 마을. 지금 이 두 마을은 시골도 도시도 아닌 얼치기로, 예전 모습을 잃은지 오래다.

외가는 외딴집이었다. 집 옆엔 동그란 햇살무늬 뜨는 계곡물이 명주자락 너울대듯 너울거리며 흘렀다. 그 옆으론 감나무와 고욤나무 그리고 밤나무가 어우러져 숲을 이루었다. 덩치 큰 호두나무 서너 그루도 텃밭과 마당 끝에 수문장처럼 서 있다. 들락거리는 사람 별로 없어 그러는지 나무는 이따금 이파리만 흔들어댔다. 으름덩굴과 머루덩굴로 덮인 울타리엔 산골의 고즈넉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우리 마을에선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이 나는 참 좋았다.

외가에선 밭일 나가기 전에 따온 수박을 커다란 두레박에 넣어서 우물 속으로 내렸다. 두레박이 물 속에 잠기면 줄을 기둥에 매어놓았다. 한낮에도 컴컴했던 물 속으로 보아 무척 깊은 우물이었을 것이다. 밭일에서 돌아온 어른들이 점심상을 물리면 수박을 건져올렸다. 칼을 대자마자 ‘쩌어억’ 하고 갈라졌다. 함박눈결 같은 선홍색 속살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접시처럼 속살을 받치고 있는 껍질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미술시간에 까만 크레파스로 꼭꼭 눌러 씨를 그려 넣던 수박 그림 그대로다.

수박 한 쪽을 베어 물자 달고 시원한 과육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얼른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이리저리 걸리는 씨를 뱉어야 했다. ‘씨 없는 것도 있다는데, 외갓집 수박엔 웬 씨가 이렇게 많담’ 하면서도, 목구멍을 타고 살살 넘어가는 단맛에 빠져 씨 뱉는 것조차 즐거웠다.

그렇게 후후 씨를 뱉어가면서 먹던 수박 맛. 수박 철이면 외갓집 풍경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거리다.

이런 추억 때문일까. 수박에 나만의 고집 같은 것이 생겼다. 밭에서 금방 따 온 것. 냉장고가 아닌 우물물에 한나절 담근 것.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 될 일이 아니다. 다만 외가에서 먹던 맛을 생생하게 추억하고픈 구실이다. 단 한 가지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수박 그림처럼 까만 씨가 앉은 것이어야 한다. 추억은 가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게도 한다.

이젠 그냥 고집이 아니라 그래야 할 까닭을 찾는다.

빨갛게 농익은 살로 입맛을 당기게 해놓고, 짐짓 제 살을 지키려는 듯 아니면 좋은 것 앞에서 급해지는 사람 마음 다스리려는듯, 수박은 촘촘히 박아놓은 까만 씨를 드러낸다.

얄밉도록 통통하게 여문 씨는 적극적인 삶의 의지다.

건강한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이며 자기 꼴을 완성시키려는 도전이다. 뙤약볕에 지치고 비바람에 시달려도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이 있어 버티고 참아냈을 터이다. 씨를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쉽게 내어줄 수 없다는 속내를 내비치는 것이리라. 속적삼에 은장도를 숨긴 여인처럼 녹록치 않다. 속이 노랗거나 씨 없는 수박을 보면, 앙탈 한 번 부리지 않고 옷고름 푼 여인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에 반한 느낌일 것이다.

쉽게 넘볼 수 없는 까맣게 여문 씨를 품은 삶. 이런 삶을 만나면 긴장되고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안온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격 같은 것을 느낀다.

요즈음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고 있다 한다. 평범하게 사는 부부들이 이러하다는 것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닌가 한다. 살 속에 앉은 씨를 여물게 하려면 뜨거운 햇볕에 단근질해야 한다. 나를 귀찮게 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나를 희생해야 하는 것. 이런 단근질을 피해 살겠다는 것일 텐데. 마치 씨 없는 수박이나 무정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을 아우른 꼴이어야 온전한 내 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씨 없는 수박 속을 그려본다. 씨를 자꾸 그리려 한다. 꾹 참는다. 아무래도 수박 꼴이 아니다. 그리다가 만 그림 같아 씨를 그려넣고 만다.

 

 

<계간 수필>로 등단.(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