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김민숙

갈림길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등성이는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진달래가 절정이다. 감탄사를 연발하던 남편이 불쑥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저쪽 등성이까지 가자며 방향을 왼쪽으로 잡는다. 약수탕까지 간다고 가볍게 따라 나왔는데 날벼락이다. 전에도 몇 번 동행했던 적이 있어서 그곳까지 가는데 한나절이나 걸린다는 것과 경사가 보기보다 수월찮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여기서 보는 것이나 거기까지 가서 보는 것이 무엇이 달라요?”

“올해 진달래는 오늘이 절정이다.”

남편은 벌써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뒤따르는데 숨이 가쁘다. 다리는 무겁고 엉덩이는 뒤로 빠지는데 앞선 그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두세 명이 넉넉히 앉아 쉬어갈 수 있는 펑퍼짐한 바위에 먼저 오른 남편은 산 능선을 조망하며 여유롭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나도 쉬겠거니 생각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넓은 바위까지 왔을 때, 서서 기다리던 남편이 휭하니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번 쉬지도 못하고 따라가자니 숨이 턱에 찬다. 그가 기다리는 곳까지 겨우 따라가면 쉴 여유도 없이 다시 출발하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다. 30년을 함께 살면서 옆사람을 배려해 준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생각하니 새삼 서럽다. 아침 운동을 수 년이나 계속 해온 남편을 내가 어찌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아내를 버리고 설마 혼자 가기야 할까 싶어서 주저앉고 말았다.

길섶에 있는 진달래나무에서 활짝 핀 꽃잎을 따서 씹는다. 쌉쌀하다. 지금껏 살아온 생이 이런 맛이었을까. 단맛은 가마득하고 씁쓰레한 맛만 입안 가득 퍼진다. 그러나 뱉어내기보다는 다시 한 움큼 더 입으로 가져간다. 늘 그랬었지. 어릴 적에 살았던 고향 마을 뒷산은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이었다. 혓바닥이 검푸르도록 따먹던 꽃잎, 어린 날에도 쓴맛 속에 숨어 있는 단맛을 알았던 것일까?

도시로 이사와서 앞뒤 집에 살면서 초,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가 있었다. 학교 성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 비슷했는데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난 후 사정이 달라졌다. 2학기가 되더니 그 친구는 나를 한참이나 제치고 학급에서 선두로 우뚝 섰다. 방학 동안 나는 고향의 할머니께 가서 한 달간 산과 들을 누비고 왔는데, 그는 학원이다 개인과외다 작심을 하고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그는 선두 자리에서 항상 여유 있게 나를 내려다보는데 비해 나는 그를 뒤쫓아가며 숨가빠했다. 때로는 잠을 설쳐가며 노력했고 이만하면 그에게 근접했겠거니 다가가면 그는 늘 한 뼘은 더 멀리 나가 있었다. 알량한 자존심과 누적되는 피로감에 지쳐 나는 그 친구를 멀리 했다.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것으로 그때의 피로는 풀리는 듯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그 사이 몇 차례 이사를 했고, 그 친구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다. 그런데 수 년 전 유명대학의 중견 교수가 되어 텔레비전에 나타난 그녀를 보고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고 말았다. 거울 속의 나는 너무도 초라해서 눈을 감고 싶었다. 그때 처음으로 끝까지 그를 쫓아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어디선가 힘이 솟구쳤다. 뒤늦은 오기인지 후회인지가 심장에 펌프질을 했을까. 지팡이 삼아 집고 가던 나뭇가지를 집어던지고 나는 꼿꼿이 서서 걷기 시작했다. 남편이 산 중턱에 서서 굽이진 능선들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릴 때도 나는 정지하지 않았다. 혼자 돌아서서 산을 내려가지 않을 바에는 한번은 고비를 넘겨야 할 일이었다. 남편을 제치고 뛰듯이 산등성이에 올랐다.

“오늘은 힘이 넘치는 모양이제?”

마음을 모르는 남편의 말이 평소의 내 허약함에 대한 비아냥으로 들렸다. 산꼭대기를 다시 한 번 쳐다본 나는 입을 열기만 해도 기氣가 다 새어나가기라도 할 것 같아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만 내딛었다. 먼저 올라가서 너럭바위를 만나면 나도 쉬어갈 참이다. 항상 여유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 어찌 뒤쫓아오며 허덕이는 이의 피로함을 이해할 것인가. 쉬다가 남편이 올라오면 바로 출발하리라.

내려오는 길에 남편이 의아한 눈으로 본다. 짐짓 여유로운 체하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인과를 배워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했더니 자식 농사나 제대로 지으란다.

집에 돌아오니 막내가 숙제가 많다며 학원에 가기 싫다고 투덜거린다. 호강에 빠져서 그런다고, 잘된 일이라고, 학원 그만두면 엄마가 더 좋겠다고 먼저 언성을 높였다. 막내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거칠게 현관문을 닫고 나간다. 남편이 말없이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본다.

 

 

대구교육대학 졸업.

<계간 수필> 천료.(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