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성城

 

                                                                                   전용희

강과 모래밭을 건넌 전동차가 동작 역사 안으로 들어가자 창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전동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사이로 바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모래의 입자가 묻어난 듯 눅눅하고 사뿟하다. 강에서 불어와 강으로 돌아가는 바람. 바람결을 따라 내가 쌓았던 모래성들과 강물 위로 띄워 보낸 종이배가 강물처럼 밀려왔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강가에서 놀다 보면 어느 새 모래 위에 붉은 노을이 스며들었다. 그러면 친구들과 나는 손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고 강 쪽을 향해 나란히 앉았다. 홀릴 만큼 황홀한 강물 위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들이 물결을 따라 흘렀다. 그 시각쯤이면 근처 공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남녀가 어울려 강줄기를 따라 걷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강가를 같이 걷는 젊은 남녀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 보였다. 남녀가 함께 걷는 것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시절이었지만 그들에게서 불순한 분위기를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나른한 피로감이 강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친언니처럼 여기고 따르던 옆집의 순미언니는 사거리에 있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순미언니에게 강변에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졸랐다. 그때마다 언니는 옆방에 계신 언니의 부모님 귀에라도 들릴까봐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미언니를 강가에서 보았다. 키가 큰 청년과 걷고 있던 언니는 나를 보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빠른걸음으로 지나갔다. 나는 눈길 둘 곳을 찾다가 애써 쌓아놓은 모래성만 무너뜨렸다.

언니 방의 창문과 내 방의 창문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강가에서 마주친 이후로 언니는 창가에서 마주쳐도 전처럼 내게 손짓을 하지 않았다.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면 미소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강가에서 마주쳐도 언니의 눈길은 먼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의 방은 밤이 이슥해도 드문드문 불이 켜지지 않는 날들이 생겨나다가 언제인가부터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는 불빛 한 줌 새어나오지 않는 언니 방의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 옆에 걸려 있을 그림을 떠올려보곤 했다. 그 그림에는 성이 그려져 있었는데,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은 아침 안개에 혼곤히 젖어 있었고, 성의 첨탑 위엔 커다란 깃발이 걸려 있었다. 성의 벽면은 돌로 쌓아 올려져 있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오랜 시간 습기와 이끼에 침식당한 듯 어두운 빛깔의 돌들과 비와 바람과 흙먼지에 부대끼어 색이 바래버린 듯한 돌, 그리고 귀퉁이가 깨어져나간 돌들과 햇빛을 받아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돌들이 섞인 성채는 서로 기대고 고여주고 있어 견고해 보였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저런 아름다운 성 안에서 공주처럼 살고 싶어” 하며 웃어보이던 언니가 부러워 나도 그런 성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을 꾸기도 했었다. 언니가 없는 빈방에서 성탑에 걸린 깃발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창문을 닫는데 가느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가 순미언니 집의 담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어둠 속에 서 있던 그 여자의 옆모습이 순미언니와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담장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날,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후로도 많은 날들을 담장에 기대 눈물을 훔치던 아기 엄마가 그림 속의 성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갔다. 순미언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름답고 견고한 성을 쌓고 있었다는 것을.

순미언니의 집이 있던 자리에 새로 이층 집이 들어섰다. 언니 방 창문이 있던 자리는 밋밋한 벽이 되었고, 내가 건너다 볼 수 없는 이층에 커다란 창이 생겼다. 창가에서 내 또래의 아이가 가끔 내 창을 향해 내려다보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우리 집은 강 건너 마을로 이사했다. 이사하기 전날, 종이배를 접어 강물 위에 띄웠다. 순미언니는 성이 있는 그림이 걸린 방에 돌아왔을까? 종이배는 잠시 기우뚱거리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가끔씩 순미언니 방에 걸려 있던 그림 속의 성을 떠올려보곤 한다. 그림 속의 성은 내가 보았던 그 어느 성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 성을 다시 보고 싶은 열망에 휩싸일 때면 순미언니도 보고싶어지는 것이다.

전동차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는 곳임을 알리는 화살표를 따라 걷다가 불현듯 이사하기 전날 강물에 띄워보낸 종이배의 행방이 궁금했다. 그 배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그림 속의 성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성에 당도했을까. 아니면 모래성을 맴돌고 있는 것일까.

 

 

숭의여전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과정 수강중.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 회원.

 

 

 

<천료 소감>

 

바람이 분다.

꽃이 피었다 진다. 꽃은 또 피었다 지고

는적는적 스러지다 다시 깨어난다.

기쁨과 슬픔이, 그리움과 기다림이 한 가지에 매달려 흔들린다.

꽃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나는 온몸이 아리다.

너는 불온한 부추김이고 눈부신 함성이다.

생이 지나간다. 너에게 기대는 동안.

생이 다 지나갈 것이다. 너에게 취해 있는 동안.

너와의 동반은 정녕 아름답다.

 

글을 내놓을 때마다 매번 부끄러움을 무릅씁니다.

여물지 못한 저의 글을 추천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허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제가 손을 내밀 때마다 따뜻하게 마주 잡아주시는 지도교수님,

고맙습니다.